폭풍우 예찬 / 박양근
여름이 되면 으레 태풍이 말썽을 부린다. 올해도 ‘민들레’라는 이름의 태풍이 닥쳐오는 것을 보니 한반도의 여름이 무사할 것 같지 않다. 누런 황톳물이 논밭을 뒤엎고 집채만한 파도가 방파제를 깨뜨리는 자연의 위력을 지켜보면 저절로 어깨가 짓눌려온다. 게다가 인명피해가 생기면 괜스레 내 탓인가 싶어 오금이 저려지기도 한다. 텔레비전이 지닌 냉혹한 사실주의 기법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책이나 영화에서 지켜보는 폭풍우는 이와 달리 매혹적일 때가 많다. 파괴의 실상보다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위력이 경이롭게 그려지는 까닭이다. 비바람에 춤을 추는 고목을 때리는 번갯불이며, 수천 그루의 나무를 단숨에 쓸어가는 파도는 수만 병사들이 진군하는 위용과 흡사하다. 이런 장면은 폭풍의 순기능을 강조한 묘사라고 하겠다. 폭풍우를 인간사와 관계하여 생각해 볼 만한 자연현상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다.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종종 폭풍우 장면을 대하게 된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 속하는 『리어왕』의 마지막 장면을 손꼽을 만하다. 리어왕은 부귀와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오만심에 빠져 절망과 파멸의 계곡으로 나둥그러진 인물이다. 두 딸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가장 충직했던 막내딸 커어디리어를 저버린 후회를 견디다 못하여 백발을 쥐어뜯는 모습을 지켜보면 기댈 곳조차 없는 노인이 생각난다. 무심한 비바람이 병든 노구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불운한 영웅을 동정하다 보면 아첨에 솔깃하고, 겉치레에 눈먼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나저러나 무슨 신분이든 인간은 결점투성이일 따름이다. 독자도 그 폭풍우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왕의 처사를 비난하기보다는 대자연의 법칙 앞에서 자신의 결점을 수용하게 된다. 이처럼 『리어왕』의 폭풍우 장면은 모든 독자를 공감시키는 배경과 인물과 언술로 이루어져 있다. 폭풍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리어왕의 진솔한 용기가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4년마다 폭풍우가 닥쳐온다. 소위 권력이 뒤바뀌는 선거 정국(政局)이다. 올해 국회의원 선거는 유례없는 태풍이었다. 원로 정객이 고목처럼 줄줄이 쓰러지고 탄탄하다던 정당마저 무너져버렸다. 도끼 자루 썩는 줄을 모르고 세월을 즐기던 철새 정치가들은 후견인들이 몰락하면서 모래성처럼 흩어졌다. 기댈 기둥을 찾느라 동가식서가숙하던 염치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봄바람에만 익숙한 그들에게 선거라는 폭풍우는 분명 끔찍스러울 것이다. 비 피할 움막조차 없는 리어왕과 다를 바 없기는 하다.
배우는 배역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정치가에게도 내려갈 때가 다가오기 마련이다. 흔히 물러설 때 어떤 마음으로 내려오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평생 일선을 지켜온 군인이나 교단에서 열성을 다한 교육자는 당당하게 내려오지만, 권력을 좇던 정치가의 뒷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양로원으로 들어서는 무의탁 노인 같다고나 할까. 3류 배우일지라도 무심코 던지는 그의 독백이 음미해 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살아야 하며, 어느 때 물러가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자성하는 속마음이 한 마디 말로 표현된다. 퇴장 배우의 말에 호소력이 넘친다면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정치가의 말은 그만큼 관심의 대상이 된다.
권력에서 물러난 정객이 남긴 말 중에는 기억할 만한 것이 더러 있다. 팽(烹), 깃털, 떡고물, 새벽닭 따위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아무리 읊조려보아도 리어왕의 독백처럼 진솔한 비장감을 느낄 수 없다. 문학과 수사학의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자기 변명에만 급급한 정치가들 때문에 국민들이 오히려 초라하게 되어버렸다. 고목은 쓰러져도 갈대는 꺾이지 않는다든가, 폭풍우가 친 후에 햇빛은 더욱 빛난다는 쯤의 표현이래도 좋을 텐데, 이런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폭풍우만큼 이중성을 지닌 자연현상도 보기 힘들다. 폭우는 파괴를 일삼기도 하지만, 사막과 밀림에 내리는 폭우는 동물을 멸종시키거나 숲을 파괴하기보다는 사막에 꽃을 피우고, 야생동물들에게 번식기를 제공해 준다. 밀림은 더욱 무성해지고 사막은 생명을 되살아가는 초지로 바뀐다. 따지고 보면 폭풍을 두려워하는 피조물은 인간들뿐이다.
사회에 불어오는 폭풍우도 마찬가지다. 변화의 바람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사회 곳곳에 활기를 주고, 현재보다는 미래의 번성을 기약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치적 종말을 폭풍우에 비유하려는 정치가의 오만은 자연의 순환을 무시하는 얕은 지식에 불과한 셈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문학적 무지를 부끄러워하지도 못하는 만용일 뿐이다.
폭풍우의 진의는 신생에 있다. 폭풍우는 순수한 기운을 소생시키고 싶은 희구의 바람에서 생겨난다. 조금씩 기압을 올려가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민풍(民風)이랄까. 그래서 때로는 폭풍우가 닥쳐와야 여름 맛이 난다. 산하에 널려진 쓰레기가 먼 바다로 떠내려가고, 바닥이 갈라진 수로가 넘칠 만큼 물이 흐르는 계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폭풍이 불면 못난 짐승들은 굴 속에서 웅크리지만 자연인은 맨몸으로 밖으로 나와 때를 씻는다. 얼마만큼의 피해가 있더라도 때맞춘 폭풍우가 하나쯤 다가와서 한발과 무더위를 가시게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정치가라면 장마철의 조용한 틈을 빌어 폭풍우가 치는 장면이 담긴 소설을 한 권쯤 읽으면 한다. 그러면 폭풍우의 의미가 떠올려지고 세례의 마음으로 비를 맞이하게 될 듯하다.
장마가 지나면 가을이 멀지 않다. 문학 속의 폭풍우를 대하면서 부활의 기운을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태풍이 없는 여름이라면 어찌 가을이 풍요로울 것인가. 겨울의 폭설과 폭풍도 두렵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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