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연 / 노신

 연 / 노신(魯迅) 

 

북경의 겨울, 땅에는 눈이 쌓이고, 벌거벗은 나무들의 거무스름한 가지들이 맑은 하늘에 치솟아 있고, 아득히 먼 하늘에 연이 하나 떠 있다.
고향에서 연을 날리는 계절은 2월이었다. 핑 하는 소리가 들려 하늘을 쳐다보면 으레 거뭇하게 게를 그린 연이거나 연노랑의 지네를 그린 연이었다. 쓸쓸한 기와 모양을 한 연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 북경에서는 핑 하는 소리도 나지 않고, 그다지 높이 솟지도 않아 쓸쓸하고 애틋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땅 위에는 벌써 버드나무 싹이 트고, 철 이른 산복숭아가 봉오리를 맺고, 아이들이 띄운 연들과 어울려 온통 따뜻한 봄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내 주위는 무서운 겨울이지만, 떠난지 오랜 고향의, 지나간지 오랜 봄날들만은 허공에서 가물거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연 날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싫어하였다. 할일없는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바로 아랫동생은 나와 정반대였다. 그때 동생은 아직 열 살쯤으로 유달리 병치레를 했고, 야위었지만 연 날리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제 힘으로 연을 살 돈이 없는데다 형인 내가 연을 날리지 않은 까닭에 작은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때는 반나절이나 그러고 있었다. 멀리서 게연이 갑자기 떨어지면 동생은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두 개의 얽힌 기와연이 풀리면 그는 깡충깡충 뛰며 좋아하였다. 그의 이런 짓이 나로서는 턱없이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 벌써 여러 날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며칠 전에 뒤뜰에서 대막가지를 찾고 있었던 게 기억날 뿐이었다. 나는 금새 알아차리고 곧장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헛간으로 가 보았다. 문을 열어보니, 과연 그는 먼지투성이의 잡동사니 더미 속에 있었다. 커다란 걸상을 앞에 놓고, 작은 걸상에 앉아 있던 동생은 깜짝 놀라 일어서더니 낯빛이 달라졌다. 커다란 걸상에 세워둔 채 아직 종이를 바르지 않은 나비연의 연살이 있었고, 걸상 위에는 양쪽 방줄 끝 머리에 다는 팔랑개비가 빨간 종이로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비밀을 들추어 냈다는 만족감과 더불어 동생이 내 눈을 속이고 이렇게 고생을 하며 몰래 혼자서 못된 아이들의 놀이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화가 났다. 나는 대뜸 나비의 한쪽 깃을 부러뜨리고 팔랑개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밟아 버렸다. 나이로나 힘으로나 동생은 나한테 당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나의 완전한 승리였다. 절망하여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남겨두고 나는 헛간을 나왔다. 그 뒤로 어찌 되었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였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복을 당할 날은 마침내 왔다. 그것은 그와 헤어진지 오랜 세월이 흘러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된 뒤의 일이다. 불행히도 나는 아동문학에 관한 외국 책을 읽고서는 놀이는 어린이들의 가장 자연스런 행위이며, 장난감은 어린이들에게 천사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정신적 학살행위가 갑자기 내 눈앞에 펼쳐져서, 그 순간의 내 마음은 마치 납덩이로 변한 듯이 무겁게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음은 끝없이 내려앉았다. 무겁게, 무겁게.
그 일을 보상해 줄 방도를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연을 주고, 연 날리기를 찬성하고, 연을 날리라고 권하고, 같이 연을 날려 준다. 같이 소리치고, 달리고, 웃고… 그러나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수염이 나버렸다.
다른 보상 방법을 알기는 한다. 동생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다. “난 개의치 않아요. 형님.” 하는 말을 듣는다. 그리 되면 내 마음은 분명 가벼워지리라.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어느 날 우리 둘이 만났을 때 삶의 괴로움으로 피차 얼굴에 주름이 늘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거웠다. 이야기가 차츰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돌아가 나는 이 이야기를 꺼냈고, 그때는 내가 생각이 모자라서 그랬었노라고 말하였다. “난 개의치 않아요” 그렇게 말해 주겠지, 그리 되면 나는 용서를 받게 될 터이고,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지리라 생각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깜짝 놀란 듯이 그는 웃으며 말하였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였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원한도 남아 있지 않은 터에 용서고 뭐고 있을 턱이 없었다. 원한이 없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내 마음은 무거워질 뿐이었다.
지금 고향의 봄이 다시금 이 타향 하늘에 솟아오르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 지나간 아득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더불어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되살리게 한다. 나는 역시 엄혹한 겨울의 추위 속에 몸을 숨기고 싶다. 하지만 주위는 의심할 여지 없는 엄동이며 살을 에이는 추위와 냉기를 나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해 설
魯迅(노신 : 1881~1936)
절강성 소홍에서 태어났다.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중국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1918년 최초의 중국현대소설인 『광인일기』를 발표했고, 대표작으로 『아큐정전』이 있다. 소설집으로는 『외침』, 『방황』, 『고사신편』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열풍』, 『들풀』, 『화개집』 등이 있다.
노신은 일반적으로 소설가로서 알려져 있지만, ‘소설가’ 못지않게 노신이 성과를 거둔 것이 ‘산문가’로서의 노신이다. 사실 노신의 전 창작을 놓고 볼 때는 소설보다 산문이 다수를 차지하고, 소설가로서의 출발보다 산문가로서의 출발이 더 일렀다. 뿐만 아니라 소설 창작은 단속적이었고, 1920년대 후반 이후 중단되었지만, 산문 창작은 그의 전 생애를 거쳐 계속되었다. 노신은 1910년대 말부터 스스로 ‘잡감(雜感)’이라 부른 독특한 산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노신 산문은 크게 두 가지로 그 성격을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성 짙은 사회비평적 성격의 산문이다. ‘잡감’은 문학성과 사회성이 겸비된 독특한 형식의 에세이로, 사회의 어둠과 중국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가차없이 해부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들 산문은 때론 전투적이기까지 하다. 오늘 이 외국수필 난에 소개하는 첫편 ‘받들어 올리기와 내려 파기’ 가 바로 이런 류에 속한다.
그동안에는 이들 부류의 산문이 노신 산문의 대표로 인식되어 오곤 했다. 그러나 사실 노신 산문은 그러한 성격의 ‘잡감’이 전부가 아니다. 중국 대륙에서 노신의 이미지를 전투적 사상가로 단순화시킨 때문에 그러했지만, 기실 노신의 산문에는 이와는 다른 스타일의 산문이 많다. 서정적이면서도 함축미가 돋보이는 산문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노신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또다른 요체가 바로 이들 산문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신의 서정 산문은 단순한 감정의 표백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경험 들을 여실히 포착하여 그것에 인생의 깊은 철학성를 부여하기도 하고, 때론 실존적 허무와 방황감을 등을 다루기도 한다.
‘연’을 통해 바로 그러한 노신 산문의 한 성격을 넉넉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