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 유소영
2월은 어정쩡한 달이다. 엉거주춤 와서는 슬그머니 가버린다. 본격적인 겨울도 아니고 , 그렇다고 초봄이라고 부를 만큼 화사한 기운이 도는 것도 아니다. 4년마다 윤달이 되는 2월은, 365일을 다달이 나눠주고 그 나머지를 처리하기 위해서 만든 덤 같은 달이다. 한해의 시작을 알리며 깃발처럼 펄럭이는 1월, 겨울 바람을 잠재우고 승전의 나팔 소리 모양 울려 퍼지는 3월, 그 사이에서 2월은 어딘지 주눅든 모습으로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겨울 방학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은 봄방학을 했다. 개학 후 며칠간 학교에 나가는 듯 싶더니 다시 늦잠을 자게 된 것이다. 이맘때면 신문에는 봄방학을 없애자는 기사가 실린다.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기 때문이다. 외국처럼 9월을 학기 시작으로 잡거나, 겨울 방학을 늘리고 봄방학을 없앤다면 그러한 2월의 분위기가 조금은 바꿜 수 있으련만, 올해도 의견만 분분한 가운데 2월은 어물쩡 허리를 넘겼다.
설 준비와 뒤치다꺼리로 거의 한달 동안 집에 매여 있었다. 아이들이 개학하고 새 학년의 준비를 하는 시기라 나도 마음이 들뜨고 어수선했다. 그러고 보니 2월은 계절이며 풍경에 눈 돌릴 틈도 없이,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거나 마음먹은 일에 집중해 본적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렸던 것 같다.
모처럼 창 밖을 본다. 햇빛이 맑고 청명하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어보나 아직은 바람이 맵다. 올 겨울에 눈이 유난히 적었던 탓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들이 정전기라도 일으킬 듯 싶게 말라있다. 유심히 살피지만 나무에 물오른 기색은 없다. 빈 가지에 햇살만이 내려앉았다. 사진기로 찍는다면 겨울 풍경이리라.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 공기의 흐름이, 햇빛의 투명도가 꼬집을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 달라져 있다.
날씨는 한겨울 못지 않게 쌀쌀하지만 겨울과 봄 사이의 해빙의 무드에 젖어 집을 나섰다. 춥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남편을 재촉하여 아산만 근처의 외암리 민속 마을로 향한 것이다. 아담한 동산을 배경으로 옛집들이 정겨웁게 모여 있는 민속 마을. 고향 어느 곳에서나 마주칠 것 같은 눈에 익은 모습이다. 포근한 정경에 취해 미소를 띤 채 차에서 내렸으나 차창으로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날선 바람이 날카롭게 선을 긋는다. 살갗에 생채기라도 낼 것 같다. 외투 깃을 바싹 여미고 가까스로 동네를 돌았다. 볼이 얼얼하고 귓볼이 빨갛다. 봄 기분을 내기에는 역시 때가 이르다.
마을 곳곳에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가지만 남은 나목들을 보며 봄이나 여름에 오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눈 쌓인 겨울에 왔어도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뭇가지에 신록을 입혀보고도 싶고 녹음과 단풍을 입혀보고 하얀 눈도 얹어 보았다. 어느 것이든 지금보다 나을 것 같다. 눈앞의 경치를 놔두고 상상 속의 허상을 본다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일 테지만, 2월의 산하가 다른 것에 비해 한순 간 눈길을 사로잡는 맛은 덜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아무려나 2월은 시각적인 계절은 아니다. 그러기에 눈으로 보는 대신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숨겨진 내면의 활동을 보아야 하는 때인지 모른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메마른 땅 속 깊이 물줄기를 보듯 , 갈망과 믿음과 기다림으로 겨울 속의 봄을 보아야 한다. 나뭇가지에 연녹색 윤기가 흐르는 3월과,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4월에 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은 적막하고 고요한 계절, 때론 칼날 같은 바람이 이는 2월에 봄을 보기 위해 서는 좀더 깊고 예리한 투시력이 필요하리라.
무채색의 황량한 휘장을 들추고서 2월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말라붙은 고치 속의 노랑나비로, 딱딱한 껍질 속 수관이 풀리고 녹색 피톨들이 눈을 뜨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몽롱하게 깨어나는 기척이 잠시 여린 태동처럼 몸을 돌았다.
어두운 태내의 공간에서 봄이 발아하는 기적의 시기. 자연은 초기의 임산부처럼 몸을 사리며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그 긴장과 설렘, 기쁨을 감추려는 쌀쌀함, 안으로 안으로만 예민해지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 2월의 나무에 가만히 손을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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