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열어 놓고 자니 / 정호경
올해 여름 더위는 유난스러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황토방에서 캐어 온 하지감자를 찌는 가마솥 더위였다. 집에 붙어 있는 창문이라고는 있는 대로 열어 놓고 거실 한복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노라면 땀에 젖은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이 짜증스러운 불볕더위에 실없는 늙은이가 무슨 힘으로 저런 거짓말을 하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더울수록 참말만 하는 사람이니 믿어 주기 바란다.
기왕 가부좌를 틀고 앉은 김에 참선 삼아 견뎌 보지만 채 5분을 못 가서 무너지고 만다. 아파트 뒷마당이 산이고 또 거기에는 숲이 있으니 재주껏 기어나가 더위를 필할 수 있지만, 밤에는 그나마 잠깐이라도 잠을 자야 다음날의 활동을 위한 휴식이 되지 않겠는가. 추위는 몇 겹으로 옷을 껴입으면 방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위는 겨울과는 반대의 방법으로 입은 옷을 하나 둘 벗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최후의 체면치레인 러닝셔츠 이상 더 벗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고 목욕탕의 물을 계속 틀어 놓고 샤워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수도요금을 걱정하는 집사람의 호통을 막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여름 더위가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잠자리에 들 때는 앞뒤 창문을 철저히 점검했다. 장롱 속에 귀금속이 있을 턱도 없지만 그런 것이 불안해서가 아니라 한평생의 몸에 밴 경계심이고 습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빈틈없는 단속에도 자다가 꿈에 만난 도둑 때문에 깜짝깜짝 경기를 일으켜 아침밥의 입맛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더위는 말뿐이지 참을 만했기에 그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올해의 더위는 그것이 아니었다. 해마다 여름방학을 하면 서울에 있는 꼬마들이 해수욕이 아닌 바닷물놀이를 하러 이곳으로 몰려온다. 해수욕은 물도 더럽거니와 밀려오는 파도 때문에 번번이 모래밭으로 쫓겨 올라와야 하는 번거로움에다 덩치 큰 어른들이 색깔 고운 튜브를 타고 바로 옆에서 놀고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차라리 집에서 세숫대야 물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낫겠다는 불평이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여수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보성의 율포 해수풀장이었다. 그 곳에는 바닷물을 끌어올려 정화시킨, 주로 어린이들을 위한 대규모의 현대식 풀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지치지 않는 종일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그 곳에 맛붙인 서울 꼬마들의 연례행사에 내가 운전기사로 동원되어야 하니 어찌할 수 없는 늘그막의 고역을 감수하여 손자, 손녀들과 함께 놀게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직사광선을 받는 종일의 놀이와 고약에서 볼아온 밤에 창문을 걸어 잠근 채 누워 견뎌내기란 정말 숨막히는 일이다. 그래서 우선 숨통을 트고 보자는 심산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자는 완전 개방의 밤이 감행된 것이다. 첫째 날 밤에는 몸에 밴 긴장감으로 자다가 일어나 꼬마들의 잠자리와 집 안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며칠 밤을 겪다 보니 의외의 경이로운 풍경이 나타나 흥미로웠다. 아파트 주변의 숲에서 종일을 울어대던 매미들이 밤이 되니 전깃불 빛을 찾아 아파트 창틀에 붙어 쉬고 있었다. 옛날의 매미들은 사람을 피해 산과 들에서 한 철을 즐기다 가는 순수 자연파였는데 이젠 그것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가까이하고 싶어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치나 다른 풀벌레들도 거실 벽 여기저기에 늦잠을 자고 있었다. 방충망이 있는데도 어떻게 들어왔는지 드 틈을 아무리 살펴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어떻든 집이 산 가까이 있는 덕택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전원주택이 아닌 전원 아파트인가. 오래되어 낡은 집일수록 빈틈이 많으니 더 많은 풀벌레들이 찾아 들어올 것이다. 나중에는 산새들도 들어와 자고 갈 것이다.
오늘 밤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매미와 여치들과 함께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서울 꼬마들을 보니 지금까지의 밤손님들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괜히 걱정이었구나 싶어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는 집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자고 있을 것이다. 이토록 무더운 밤에는 모드들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을 터이니 남의 집을 기웃거려 봤자 인건비도 못 건질 허탕일 것이라는 판단이 섰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한밤에 선잠을 깨워 놀라게 하지 않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자연과 함께하는 한여름 밤의 낭만이라고 할까.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세월도 있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밤손님보다 더 무서운 이 무더위는 언제쯤 물러가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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