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소리 / 정목일
2월은 기수(旗手) 뒤에 서 있는 키 작은 사람같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얼굴의 윤곽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팔삭둥이처럼 무언지 좀 부족한 듯이 느껴진다. 햇빛을 환히 받는 웃음띤 얼굴이 아니고, 응달에 얼굴을 숙이고 있는 못난 사람 같다. 제몫을 챙기지 못하고 왜소한 인상을 지니고 있어 왠지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1월은 대망과 희망 속에 위세가 등등하다. 새출발의 나팔 소리가 울리고 깃발이 나부낀다. 연하장과 축복 속에서 새 각오와 기대로 흥분이 인다.
2월이 되면 흥분은 가라앉고 초발심은 시들해진다. 한해살이는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세월이 가면 한해가 지나갈 것이다. 2월은 어정쩡하고 특징도 없다. 3월이면 새봄이 시작된다. 봄을 통해 탄생을 경험하고 재출발을 도모한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봄을 수용함으로써 새출발의 환희를 맛보는 것이다.
2월은 1월의 패기와 3월의 활기 가운데에 끼여 잔뜩 주눅이 든 못난이 같다. 데리고 온 의붓아이거나 소박데기처럼 보인다. 기업주는 임금을 주기가 아깝고, 근로자들도 보내기가 시원섭섭하다. 2월은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아이 취급밖에 받지 못한다. 슬며시 등뒤로 얼굴을 숨기는 달이다. 이미 일출의 장엄한 햇살과 우렁찬 나팔 소리와 새출발의 덕담도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2월은 성찰의 달이다. 들뜸과 산만함을 털어버리고 고요하게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싶은 달이다. 소외와 무관심에 낙담만 하지 않고, ‘나는 진정 누구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를 생각해볼 때다. 조용히 자신으로의 응시와 자아의 발견을 통해 걸어가야 할 인생 목표점이 어디인가를 생각하고 싶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합당한 출발선인지를 점검해보고 싶다.
2월이면 모두가 팔삭둥이가 돼보아야 한다. 함령 부족인 것을 느끼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2월은 태어날 때부터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기에 황금 같은 2~3일을 떼어내 11개의 달들에게 골고루 나눠줘버렸다. 남들이 업신여기고 제대로 봐 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제 더 양보하고 느슨하게 지낼 틈도 없이 된 것을 느낀다.
‘이제 어떻게 하지?’
2월이 파리해진 얼굴로 추위에 떨면서 독백하고 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꼬마 2월에게 다가가 말해주고 싶다.
“2~3일 부족하다고 해서, 항상 뒤지는 건 아니야. 하루하루를 알뜰히만 하란 말이야.”
그렇다. 남을 의식할 필요 없이 바로 자신과 약속할 때다. 조용한 정진과 겸허한 삶의 자세와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흐지부지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 비어버린 시간을 내적 성실과 성숙으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이란 연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성장과 단련이 필요할 때다.
2월엔 인적이 드문 산에 가보곤 한다. 나무들은 고독과 시련 속에 있지만, 고요롭고 평온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거추장스런 욕심과 치장 따위를 모두 벗어버리고 진실과 순수의 모습으로 서 있다. 묵상과 기도 속에 잠겨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거룩해 보인다. 바람은 쌀쌀하고 냉기가 살갗 속으로 파고든다. 얼어붙은 땅은 나무들을 단단히 옭아매고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지만, 세찬 바람결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면서 피리 소리 같은 맑은 음(音)을 뿌리고 있다.
2월은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뜨거운 불길로 생명을 잉태시키고 있다. 매화 가지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봉오리가 숨을 쉬고, 창백한 나뭇가지에 아슴푸레 물기가 돌고 있다. 2월은 고독과 소외 속에서 찬란한 봄을 예비하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짧다는 걸 알고 있어선지 최선의 성실과 노력을 다하려는 결의가 보인다. 누가 2월을 만만하게 볼 수 있단 말인가.
2월은 출발선을 떠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고 다시금 자신의 갈 길과 방향을 확인해야 할 때다. 학생들은 새학기를 기다리며 지난 한 학년을 성찰해보아야 한다. 또 진학의 길에서 자신이 맞아야 할 환경과 삶의 길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2월은 눈에 잘 띄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는 짧은 달이지만, 우리에게 새로움과 기대를 갖게 하는 달이다. 생명의 봄과 새학기를 예비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꼬리가 잘려 어느새 3월로 넘어서고 마는 듯하지만 2월엔 생명의 빛깔, 축복의 향기가 깃들어 있다.
2월엔 애잔하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 ‘2월 인생’ 인 것처럼 생각된다. 나이가 들수록 남보다 부족하면서도 시간마저 짧은 것을 느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런 생각 끝에서 봄을 알리는 생명의 잎눈이 깨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2월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다.
2월은 보이지 않는 신비다. 죽은 듯 잠자코 있지만, 생명을 탄생시키고 환희로 물결치게 할 힘을 비축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웅크린 힘의 긴장과 맥박을 좋아한다. 2월은 마음 속에 비장한 결의의 은장도를 숨겨두었다. 집중력을 불어넣어 생명의 불길로 언 땅을 녹이고 천지에 다가올 봄길를 필사의 힘으로 열어제치고 있다.
2월엔 매화의 움트는 소리가 들린다. 예비하고 잉태하는 달이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지만, 항상 기도 속에 깨어 있다. 2월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허함과 인내 속에 오늘의 성실로 내일을 여는 슬기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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