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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봄날 사랑을 팔다 / 윤영

봄날 사랑을 팔다 / 윤영

 

 

 

산비탈에 그물집이 생겼다. 사방팔방으로 둘러친 골프망은 산과 하늘까지 조각냈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칼끝에도 끄떡없을 것 같다. 그물이 봄을 가두었나, 올해는 유난히 더디다. 창가에 놓인 재스민은 계절을 잊고 겨우내 꽃을 피우더니 사위어간다. 한때 절정의 시간이 지금 해가지듯 쓸쓸하다.

마지막 향기 뿜어대는 흰 꽃의 절규에 잠시 나를 맡긴다. 티켓 하우스 파티에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 안에 홈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포인트가 삭제된다고 난리다. 딸애는 요즘 유행하는 ‘러브 박스’ 에 빠졌다. 물론 사이버머니지만 아르바이트 해서 러브라는 점수를 얻는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을 대리만족한다고 한다. 고급스러운 액세서리를 사고 도도미용실에서 요란한 파마를 한다.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을 적당히 포인트로 누릴 수 있으니 그곳은 천국일 터이다.

가상세계는 화려했다. 붉고 푸른 뾰족 지붕이 즐비하다. 길거리에는 사람보다 화려한 옷을 입은 명품 견들이 누빈다.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고 메이크업 숍에서 화장을 한다. ‘아이 러브 유’ 를 외치며 친구들이 몰려다녔다. 뒹굴어도 먼지 하나 묻을 것 같지 않는 도시가 밤이 늦도록 유혹한다. 성형외과는 예약으로만 가능하다고 했던가. 반짝반짝 동굴 속 지하 바에서는 파티가 열기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나서 몇 개의 지층을 지나니 이번에는 비행 섬에 전용 비행기들이 기다린다.

난감하다.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이리라. 엄마는 무엇이든지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지 않던가. 급한 마음에 마우스를 넘겨받았다. 집을 찾고자 이리저리 헤맸다. 돌아오는 길이 은근히 나를 유혹하다니. 매화 마을이다. 클릭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가 이곳을 사이버 세계라고 말할까. 꽃잎이 봄바람에 쏟아진다. 구름을 살짝 껴안은 계곡에는 물소리가 들리고 새가 울었다. 이곳에도 오월인가. 산 복사꽃 드문드문 핀 고향 마을에 온 듯하다. 나무계단을 지나니 바이허 할머니네 전통찻집이 보였다. 정갈하다. 뜰에는 일년초 꽃들이 예서제서 피고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살 것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차를 마시고 꽃을 사기 위해 딸애가 푼푼이 모아둔 거금의 사랑을 또 팔아야만 했다.

마우스를 빼앗겼다. 집에 갈 생각은 않고 포인트만 없애는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새 나는 구경꾼이다. 레벨이 낮아 고급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노랑머리 친구들이 손을 흔들고 간다. 벤치에 누웠던 노숙자들이 한 푼만 달라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다. 돈 버는 일에 귀찮아지면 사나흘 안에 저런 꼴이 된다니. 공주가 되기를 소망했던 아이는 저런 모습이 무서웠으리라.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산타할아버지가 되어 선행을 베푸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자랑이다. 모퉁이를 지나자 성당이 보였다. 노트르담 성당 모양과 흡사하다. 가상의 세계에도 종교가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성당의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무렵에야 도착했다. 오래 길을 잃고 모녀가 헤맸다. 어느새 바깥세상은 아둑시근하다. 집에 오니 불이 환하다. 마당에는 앵두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몇 냥의 사랑을 팔아 심었을까. 옷장 안은 핑크빛 드레스로 가득 찼다. 아직 살 게 많은지 한참을 투덜거린다. 철없는 주인을 만났건만 나무는 몽우리를 맺어 주었다. 꽃을 피울 무렵 많이 아파할 거라고, 사랑을 팔더라도 영양제를 사서 주라며 일러주고 종료버튼 눌렀다.

단막극의 묘미가 이런 걸일까. 사각의 틀 안에서 잠시 흥분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유독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집착한다. 그저께 보아놓고 고민하다 다시 갔지만 이미 팔리고 없는 겨자색 외투가 그러하다. 스무 살에 만났던 금강하구의 봄 풍경을 왜 카메라에 담지 못했을까.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가 앞서가는 남자에게 날아온 향수 냄새에 몇 날 며칠을 잠들지 못했다. 향수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도 좋았을 것을. 곁에 없다는 것에 대한 소망이랄까. 혹 마음에 쟁여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아닐는지.

곁에 없다는 것에서 딸애와 나는 다르게 나누어 가졌다. 미래를 꿈꿀 때 추억을 만나고 스타벅스 길거리 문화를 접할 때 전통찻집을 두드린다. 튤립 꽃밭에서 가든파티를 할라치면 제비꽃을 찾아 숨어들었다. 속살거리듯 달려드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때 머쓱할 정도로 옛사람의 꼭지만 찾았다. 여전히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지니가 살고 있을 거라고 믿는 아이다. 지니도, 티켓 하우스의 파티장도 믿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없을까마는 너무 멀리 와버렸을까.

허나 어느 봄 한때 사랑을 팔아 무릉도원을 샀으니 가상의 세계면 어떻고 주책없는 엄마이면 또 어떠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