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당리역 / 성낙향​

당리역 / 성낙향

 

늦은 밤, 기력이 소진된 몸 안에는 집으로 가야겠다는 욕구 하나만 팽팽히 살아난다. 가게 문을 닫은 뒤, 지친 몸 위로 찐득하게 달라붙는 네온 불빛들을 뜯어내며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지상에서 바로 탈 수 있는 버스노선이 많은데도, 매번 한참을 더 걷는 수고를 무릅쓰고 지하로 내려온다. 온갖 종류의 상점들과 시설물들과, 각색 군상의 사람들로 출렁이는 번화한 지상과는 달리 지하공간은 단순하다.

수송만을 위한 열차와 어딘가로 수송되어지기 위한 욕구 하나만 가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 그 공간에는 하루 종일 열차가 들어오고, 열차가 지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열차를 타고, 열차에서 내린다. 그것뿐이다. 동일한 동작과 행위만이 반복되는, 괘선지 같은 공간의 단순함이 나를 거기로 이끈다.

80여 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와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어둑신한 직선의 통로를 걷노라면, 부챗살처럼 갈라졌던 마음이 비로소 하나로 모아진다. 저마다 다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각종 청구서와 영수증 뭉치로부터 놓여나 원래의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을 느낀다. 마디를 조이던 나사들이 헐겁게 풀린 듯 몸이 이완된다.

아침 출근시간에도 지하 공간을 찾는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면 버릇처럼 가판대 위의 각종 신문들을 쓱 훑어보고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가판점 외벽에 부착된 그 달의 잡지광고 포스터를 들여다보곤 했다. 지하철 당리역 구간에는 지하세계의 질서에서 슬쩍 벗어난 노인이 있다. 가판점 주인이 바로 그다.

언제나 초록색 등산조끼를 입고 있는 노인은 다리를 약간 절었고 좀 예민했다. 사지도 않으면서 신문 귀퉁이를 뒤적이며 헤드라인을 읽는 사람에겐 벌컥 화를 냈다. 대부분의 기산, 그는 가판점 안에 오도카니 앉아 있거나 앉은 채로 고개만 기울인 채 선잠을 자곤 했다. 이따금 그곳에서 나와 가벼운 몸 풀기 체조를 항 때도 있었다. 그럴 때의 노인은 껍질을 벗어버린 민달팽이처럼 보였다. 신문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3년 동안 나도 신문 두어 부와 잡지 서너 권 산 게 전부였다.

어느 날 오전엔 출근시간에 2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서둘러 열차를 타려던 마음을 접고, 가판점 부근 벤치에 앉아 열독 중이던 책을 꺼내 좀 일고 가기로 했다.

의외로 승강장에서의 책읽기는 힘들었다. 날카롭게 울리는 열차의 진입신호음과 안내방송이 몇 분마다 되풀이되고, 잇달아 레일을 달리는 열차의 굉음이 들이닥쳤다. 귀 속으로 몰려드는 소음 때문에 신경이 거슬려서 도저히 책 내용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곧장 열차를 타고 떠나던 짧은 시간 동안엔 느끼지 못했던 승강장은 엄청난 소음의 세계였다. 열차가 오면 바로 타고 떠나야 하는 지하역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그곳은 가혹한 공간이었다.

판매가 신통찮아선지, 좁은 공간에서 옴츠린 채 소음을 견디며 지내는 일에 진력이 난 건지, 한 달 전쯤부터 노인은 승강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승강장으로 내려갈 때마다 가판점의 창문엔 커튼이 드리워지고 쪽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가판점이 폐쇄되고 환한 형광불빛 아래 놓였던 신문과 잡지들이 사라지자, 기나긴 승강장 전체가 전원이 꺼진 텔레비전 화면처럼 먹먹했다. 그리고 스산했다. 지하철의 열린 문으로 발을 옮길 때도 등 언저리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열차 좌석의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창밖으로 조금씩 멀어져가는 가판점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잘 팔리지 않는 신문 사이에서 선잠 자던 노인을 품고 있던 가판점. 그 작은 가판점이 그동안 어둑신한 지하공간을 푸근한 훈김으로 덥혀 왔다는 것을 말이다. 다리를 약간 절고, 키가 자그마하며 성마르던 그 노인. 노인은 늘 그 자리에 머물면서 승강장에 내려온 모든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는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봐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물론 노인이야 자신이 누군가를 맞고 배웅했다는 생각을 못하겠지만, 나로서는 노인을 그 자리에 귀환의 표식처럼 남겨두고 떠난다는 사실에 그동안 어떤 위안을 받아 왔던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