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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아버지의 곳간 / 백명철

아버지의 곳간 / 백명철

 

 

 

여든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시각 일급 장애인 등급을 받았다. 농사일은 물론 혼자서는 가까운 이웃 나들이조차 어려웠다. 하루 종일 거실의 의자에 묵묵히 앉아 있거나 방 안에 누워 있게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보청기에 의지해서 겨우 소통이 가능했던 터에 시력마저 잃었으니 여생을 어떻게 버텨 나가실지 바라보는 자식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주말마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들판으로 차를 몰았다. 당신의 눈에 익은 산과 들의 흐릿한 윤곽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모를 얼마나 심었는지, 나락은 어떻게 여물었는지 손을 놓아 버린 농사일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심초, 바우고개 같은 가곡이나 김삿갓 등 흘러간 대중가요를 불렀다. 나는 왠지 서먹서먹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끄덕이는 아버지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어느 가을철이었다. 들판 길을 달리며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차 안에는 친밀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로 시작되는 고모령 노래가 끝났을 때 잠시 침묵에 잠겼던 아버지가 슬며시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그때 네 할머니가 참 많이 울었어.”

아버지에게서 듣는 할머니 얘기가 처음인지라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멀찍이 쳐진 새끼줄 바깥에서, 몰려든 아낙네들과 함께 할머니는 연신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 내며 자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집이나 길에서 마구잡이로 징집된 청년들이 입영 절차를 밟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였다. 살아서 돌아오기를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전황이었다. 마지막 절차에 신체검사가 있었다.

꼭 사고내기 십상이네. 가서 열심히 농사나 지어라.”

군의관은 고막이 남아 있지 않은 아버지의 귀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갔던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어. 다 운이지.”

밭은 숨으로 잠시 뜸을 들인 아버지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득한 기억 속에 쟁여 둔 노인의 지난날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미는 것을 나는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다.

어느 날,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고 있는 아버지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난 친구였다.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들먹이며 은근히 가입을 권유했다.

아이구, 귀도 어두운 내가 뭘.”

바깥 활동이 질색인 아버지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손을 내저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그 친구는 갑자기 사라졌다. 죽었다느니 북으로 갔다느니 소문만 무성했을 뿐 다시 볼 수 없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어. 앞일을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한숨을 내쉬며 이어지는 아버지의 얘기는 참혹했다. 피란길에서 본 배가 불룩한 시신들, 형무소 담장에서 행해진 총살형, 살인 도구로 변신한 대나무 창, 이글거리는 한밤의 모닥불 등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전시의 아슬아슬한 나날들이 마을 사람들을 제대로 숨도 못 쉬게 만들었다. 불안으로 밤잠을 설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버지의 좋은 시절을 물었다.

네 엄마한테 장가갔을 때.”

쑥스러워하는 아버지에게 슬쩍 퉁을 쳤다.

에이, 그런 것 말고요.”

그다음에는 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나의 신통찮은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빨간 고추가 달린 금중을 대문에 내가 걸 때의 감격, 삼칠일이 지난 후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돌릴 때의 뿌듯함, 돌 지난 첫아들과 함께 처갓집에 갈 때 예쁘게만 보이던 열아홉 색시 등, 아버지가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한참 동안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쏟아내던 아버지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네 엄마와 함께 미국 여행했을 때도 좋았다.”

십 년도 더 전, 나는 운 좋게 미국 워싱턴 주의 한 대학에 일 년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안식년을 이용한 자매 대학 방문 교수 자격이었다. 석 달 가까이 지속되는 여름 방학 때 아버지, 어머니를 초청하여 보름 정도 서부지역의 국립공원 관광을 하였다.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 모뉴먼트 벨리 등 주로 자연경관이 어마어마한 지역이었다. 뒷좌석에서 수시로 꾸벅대는 어머니와는 달리 조수석에 앉은 아버지는 한순간도 졸지 않았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다른 거대한 풍광에 온전히 혼이 빠진 듯했다. 매일 대여섯 시간씩 운전을 해야 했던 나는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에 신이 나서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때 먹었던 아이스크림, 어째 그리 맛있었겠노.”

더운 여름철에 인디언 가게에서 잠시 쉬며 먹었던 아이스크림이 내 머리에 언뜻 떠올랐다.

너무 많은 말씀에 피곤을 느꼈는지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침묵에 잠겼다. 차는 천천히 동네 어귀로 들어섰다. 약간 숙인 고개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히 곁눈질해 보니 때때로 아버지의 입 언저리가 올라가거나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하였다. 어떨 때는 침을 꿀꺽 삼키기도 하였다. 궁금해 하는 내게 아버지는 저절로 떠오르는 활동사진을 본다고 하였다. 지난날 당신의 곳간에 쌓였던 온갖 것들이 생생히 펼쳐진다고 하였다.

육십 평생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의 곳간을 더듬어 살펴보았다. 농이 빠져나오는 어린 아버지의 귀를 고치기 위해 양의원과 한의원을 전전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상대방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혼자서 들판을 해매는 청년의 쓸쓸한 모습도 보였다. 그 곳간 깊숙한 곳에는 오월의 모란처럼 환히 웃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더 깊은 안쪽에는 갓 태어난 아기의 선모를 위하여 연신 입바람을 불며 장작불을 지피는 아버지가 보였다.

내 곳간에는 아내와 자식들이 판을 치고 있을 뿐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바쁜 체 핑계를 대며 아버지를 뒷전으로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또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행한 일들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옆 가게에 차를 세우고 고깔 콘 아이스크림을 두 개 샀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를 내 곳간에 채우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