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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참 잘한 일 / 김상립

참 잘한 일 / 김상립



 

 지금도 책이 잘 팔리지 않고 문학 전문 서적은 더욱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장차 다가 올 세상에서는 종이 책에 의존해 왔던 정통문학이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은 그 자체가 삶의 한 부분으로써 사람과 필연적으로 어울려 살아져야 하는 까닭에 인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어떤 형식으로든지 살아 남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활자 매체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앞날은 첨단과학이 만들어 내는 고도의 편의성과 안락함 때문에 세상이 온통 장미빛으로 치장되리라는 시각도 있지만, 반대로 인간관계는 더욱 삭막해지고 개인은 뛰어난 기계의 능력 앞에서 한없이 위축될 것이며, 공해나 환경파괴로 건강을 지키며 살아 가기가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는 않다. 이러한 비관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피로해진 미래 사회의 사람들은 진정한 휴식과 위안을 간구하게 될 것이고, 이를 위한 방편으로써 문학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주장을 덧붙이기도 한다.

사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야 하는 요즈음 사람들보다 더 속력을 내며 살아야 할 장래의 사람들에게는 소설의 부피나 시의 난해성이 다소 부담을 줄 소지가 있음으로, 글의 내용이나 길이로 볼 때 수필이 딱 좋은 읽을 거리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또 모든 정보에 엄청난 속도가 실리고 다양한 직업으로 인한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한 내일의 독자들은 여러 가지의 간접체험을 절실하게 요구하게 될 것이고, 이런 갈증을 소설이나 시가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리라는 예상도 쉽게 해 볼 수 있다. 결국 생활의 문학이요 체험의 문학인 수필이, 미래 사회에서는 가장 가능성이 큰 문학이 될 것이라고 장담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이런 주장이 내 나름의 좁은 소견에서 비롯된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을 작정이다.

근래에 와서, 수필이 문학으로 제대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실험 수필을 쓰는 등 직접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을 적지않게 본다. 그들은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지나왔던 수필이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기 보다는 어떤 형식으로든 변해야만 살아 남는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낯설게 하기퓨전 수필 영상 수필 같은 새로운 기법들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의 문학이야 말로 영상이나 사이버 문학으로 급속히 전환해 가야하고, 또 대부분의 사이버 공간을 장악해 버린 젊은 세대들을 새 고객으로 공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작법이 수필 본래의 속성을 무시해 버리고, 그 범주까지 벗어 나면서 까지 무리한 실험을 계속한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소지가 있는 것이다. 글의 속 내용은 변하지 않았으면서도 겉으로만 변하는 척 하는 속임수나, 적당히 흉내낸 작법이 마치 대표적인 신 수필처럼 행세하게 된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될 터이다. 예를 들면 낯설게 하기라 하여 엉뚱한 시각이나 공상 같은 허구를 차용하여 작품을 낯설게 만들었다면 과연 그게 옳은 방향이 될까? 또 퓨전 수필이라 하여 고의적으로 수필을 시처럼 써 보고 단편소설 같은 구성을 보인다거나, 드라마같이 대화체가 주를 이루는 글을 쓴다고 하여 반드시 새로운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작금의 시대가 문학의 탈 장르 현상을 가속화 시키는 요인들로 둘러 쌓여져 있다 할지라도, 시는 시로써, 수필은 수필로써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하여 진정한 수필이란 어디까지나 체험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상상력, 문학적인 감성, 미래를 개선시켜 나가려는 창조성 같은 게 잘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내일의 독자들이 요구하는 제 모습을 갖추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은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사용되는 한 수단이고, 그 수단 중의 하나가 수필이라 보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만약 누가 뛰어난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여 수필을 썼다 하더라도, 이런 근원적인 목적을 상실한다면 문학으로서 수필은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할 것이다. 예나 이제나 먼 훗날을 가릴 것 없이 인간들이 삶을 영위해가는 한 풀어야 할 숙제들을 지닐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러한 삶의 원초적인 문제들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우려 언제 읽어도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 생생히 살아있을 글을 쓴다면, 형식을 고사하고 그 작품은 시간을 뛰어넘어 긴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분명 지금의 정보화 사회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현대문명의 해독제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어 온 자연이어야 할 것이다 라는 말처럼 정보화 사회 다음에는 자연화 사회가 올 것이라는 신념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정보화 사회가 앞으로 나가고 또 나가보지만 더는 어쩔 수 없어 자연으로 도로 돌아 오리라 예상하듯이, 전자 책이나 영상 물에 빠져있던 독자들도 결국은 종이 책을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을 굳게 믿는 까닭이다.

생각해 보라. 예측불허와 가중되는 불안, 심각한 가치의 혼돈이 빚어 내는 우리사회의 상처가 대처하지 못할 만큼 크게 덧나기 전에, 의연하고 용기 있게 문제를 고발하고 동시에 위로와 희망을 얘기하는 역할의 중심에 수필문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수필을 어떻게 쓰느냐 보다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고, 무엇을 쓰느냐 보다는 무엇의 내용이 더 중요하게 평가 받을 것이며, 그 내용 보다도 더 더욱 중요한 것은 수필가의 정신 세계가 되리라.        

이 시대에 가장 깨어난 사람이라 불리는 ‘틱낫한’ 스님은 ‘만일 그대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한 장의 종이 안에 떠 있는 구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 했다. 시인이란 표현 대신에 수필가로 바꿔넣은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는 말한다. ‘구름이 있어야 비가 있고, 비가 와야 숲이 산다. 숲은 나무로 이루어 지고 큰 나무가 자라야 펄프가 생산될 것이니 결국 구름과 종이는 함께 존재해 있고, 종이와 벌목 꾼 또한 같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모든 것들이 없다면 종이도 없는 것이다.’

종이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보이는 것들로 인해 종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무릇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다. 그렇게 만물은 서로 서로가 깊은 연관성을 지닌 채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고, 이 연관성을 더욱 따뜻하고 친밀하게 엮어가게 하는 힘이 바로 ‘사랑’이란다. 문학과 사랑, 그것은 지금이나 미래에서나 변함없는 테마가 되리라. 아무리 수시로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고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은 그 보다 더 변덕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사랑이라고 이름 지어진 마음자리의 속성은 매 순간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을 터이니 사랑을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 문학 역시 보다 먼 곳에 머리를 두어야 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쓰여질 수필들이 이런 측면을 얼마나 성실하게 반영시킬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필 하는 사람들의 마음 만이라도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로 함께 엮어져 있는 수많은 존재’에 대해 깊은 통찰과 애정을 가지고 매진한다면, 다가올 세상에서는 수필이 진정 환영 받는 문학으로서 활짝 날개를 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내 또한 오랜 기간 열심히 수필을 쓰며 살았던 날들이 내 삶에 있어서는 그래도 참 잘한 일이였다는 행복한 회상 속에서 붓을 놓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슴에 안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