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 소리 / 문육자
스님의 생활이 담긴 ‘법정스님의 의자’라는 영화는 송광사에서 거행된 다비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즐겨 입으시던 가사 덮인 법체가 장작 속에서 이승과의 마지막 결별을 고하며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더군요. 그 소리는 죽비가 되어 ‘맑고 향기롭게!’ 하면서 가슴을 치는 소리로 둘렸습니다.
30년 전에 쓴 <미리 쓰는 유서>에서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 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던 정갈한 모습 그대로더군요. 무소유로 살다 의자 하나 내어 주고 무소유로 떠난 스님의 생애 그대로였습니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으니 숙부와 사촌동생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통영의 미래사로 들어가 아집과 교만, 그리고 세속과의 인연을 끊었던 때가 대학 3학년 때더군요. 스님, 스승인 효봉 스님과 어찌 그리 같은 분이었습니까. 일본의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의 판사가 되었던 분. 판사 10년에 민족투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게 되자 허망한 삶에 회의를 느껴 출가한 분. 그리고 3년간 엿장수를 하며 전국을 방랑하다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가 삭발한 분. 이런 분과 인연이 맺어졌으니 어찌 영향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참나무 장작개비로 손수 만든 의자며 ‘1967.12.3.’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놋대야, 빨랫줄에 걸려 있던 빛바랜 옷들은 청빈으로 인도했던 효봉 스님의 가르침 그대로였습니다. 공양 시간에 늦었다고 호되게 야단을 듣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마당을 쓸고 들어왔을 때 엄하기만 한 스승은 말없이 국수 한 그릇을 건네더군요. 스승의 깊은 배려가 가슴에 차올랐겠지요. 그러기에 불가에서는 국수를 스님의 미소, 승소(僧笑)라고 하나 봅니다. 도를 깨치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제자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시더니 쉰셋이 되어서야 제자를 받아들이었으니 그 깐깐함도 청빈에서 온 것인지요? 그리고 제자들에겐 중이 출가할 때보다 체중이 더 나가면 공양한 돈을 헤프게, 또 배불리 먹은 결과라며 경계하게 하던 모습은 바로 그 스승에 그 제자였습니다.
스님은 버리기와 나눔을 그대로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얻었으면 주어야 한다고 불자들에게 이야기하며 기도의 공덕을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야 한다는 회양(廻向)의 정신을 강조하더군요. 그때 가톨릭 신자인 저는 나눔이란 주고받음이 아니라 타인에게 돌려주는 가톨릭 정신과도 일맥상통할 뿐 아니라 사람살이의 정도(正道)임을 느꼈답니다. 가치 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라고 버리는 삶을 강조하더군요. 그러나 단지 버릴 수 없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움이란 가장 단순하고 절제된 것이기에 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제 마음이 떨리더군요.
또한 나눔을 곳곳에 연꽃처럼 피워내더군요. 책을 낸 후에는 어찌나 인세를 독촉하던지 샘터사 김성구 사장은 ‘중이 뭐 저리 돈을 밝히나’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난한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기한 내에 내기 위함이더라고 웃으며 술회했습니다.
스님, 유년을 한 집에서 같은 방을 쓰며 친형제처럼 지내던 사촌동생, 수광(壽光) 박성직 선생을 아시지요? 스님이 출가한 뒤 청년시절을 많이 방황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스님이 1955년부터 1970년까지 15년 동안이나 격려의 편지를 보내 주었기에 그것이 위안이었고 희망이 되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처럼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그 편지글을 엮어 <마음하는 아우야>라는 책으로 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속가의 인척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차고 인색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만큼 스스로에게도 혹독하게 속세와 인연을 끊기 위함이었다고 덧붙이더군요.
그런데도 도(道)의 길에 이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던가요? 1975년부터 18년 간 거처하던 송광사 뒷산의 불일암을 홀연히 떠나 강원도 오대산 산골로 들어가셨으니…. 거처하던 화전민 터 산자락의 오두막 ‘水流山房’에는 ‘나 있다’라는 표지와 해우소에는 ‘기도하기’라는 글자가 씌어 있어 스님이 철저히 혼자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화면에 흘러내리던,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숫타니파타에서’에서 인용된 글처럼.
스님, 죽음을 예감하고 계셨죠? 폐암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밤의 고요를 즐길 수 있게 해 준 기침에 감사하고 계시더군요. 깨어 있되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던 스님, 세상에 진 말빚을 갚고 가지 못함이 그리도 안타깝던가요? 전설처럼 내려오는 고승들의 죽음인 천화(遷化)를 생각하셨기에 산으로 들어가신 것은 아니었겠죠? 아무도 다니지 않는 산속으로 정처 없이 들어가다 힘이 다하여 죽음 직전에 이르면 나뭇잎 긁어 자리 만들고 한 자락 이불처럼 덮고 하직하는 죽음을요. 스님의 성품으로 볼 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한 줌 흙이 되기를 바라셨겠죠.
스님, 2009년 시주 받아 놓은 길상사 봄 법회에서 “봄날은 갑니다. 다하지 못한 말, 새로 돋아나는 잎과 꽃의 침묵의 언어로부터 들어주기 바랍니다.”라고 끝을 맺어 자연이 주는 섭리를 터득해야 함을 은연중에 알려 주시더군요.
책과 한 모금의 차, 트랜지스터라디오, 작은 채마밭만을 남기고 ‘중답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많은 사람들이 회고했습니다. 올곧게 사셨다는 말이겠지요. 모두를 버렸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가신 스님, 매화꽃 아래 스님의 첫 작품인 의자만이 꽃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답게 산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생각합니다. 스님의 생활이, 주옥같은 글과 말씀이 죽비가 되어 따갑게 가슴을 칩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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