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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착시 / 공진영

착시 / 공진영

    

 

 

초겨울이다. 볼일이 있어 지하철을 탔다. 바깥에서 떨다가 차내로 들어서니 공기가 후끈하게 느껴졌다. 첫 추위에 감기 들지 않으려고 겹겹이 껴입은 옷이 거북스레 느껴진다. 외투를 벗고 싶었으나 장갑을 벗는 것으로 대신했다.

열차가 출발하여 규칙적으로 흔들리자 전신이 노곤해지더니 졸음이 엄습해 왔다. 나도 모르게 살포시 졸고 말았나 보다. 눈을 떠보니 탈 때에는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에 어떤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시선이 내 신발에 꽂혀 있음을 직감했다. 반가웠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가 내 신발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기 때문에 딴 것은 몰라도 신발만은 고급을 신는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도 미국 사스(S·A·S)회사에서 제작한 특수화이다. 값은 여느 것의 삼사 재를 치르고 샀건만, 아무도 그 진가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계로 뽑아낸 구두는 날렵하고 세련된 모양새에 윤기마저 반들거려서 대번에 남의 눈길을 끌지만, 내 구두는 부들부들하고 푸석해 보이는 특수 가죽에다가 수작업으로 처리를 했기 때문에, 다른 것에 비해 도리어 둔탁하고 조잡해 보여, 혹자는 중국산 비닐 구두가 아니냐고 묻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맞은편 좌석에 앉은 여인은, 잠깐 동안이 아니고 사뭇 내 신발에 관심을 가지고 감상을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모처럼 사람 만난 기분이었다.

저분은 분명 신발에 대한 지식이 깊은 분일 것이다. 어느 백화점 신발 코너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아니면 제화공장 사장 따님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녀는 잠시도 내 신발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즐기고 있는 표정이다. 나는 나대로, 안 보는 척하면서 그녀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나는 나름대로 무슨 보답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신발을 한 번 들었다 놓으며 위치를 약간 옮겨 주었다. 그랬더니 여인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졌다. 옅은 미소마저 뛰면서 즐거워했다.

어떤 사물에 대해 깊이 알면 즐거움이 생긴다고 했다. 법열(法悅)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공자께서도 배워서 깊이 알면 즐겁다고 했다.

어떤 때는 내 신발이 고급이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게 이래뵈도 미국산 고급 특수화야.’ 하고 불쑥 내민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 온몸이 오그라드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뜻밖에도 진인(眞人)을 만나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되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열차가 멈춰 섰다. 맞은편 여인이 내릴 차비를 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기대를 가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선생님, 참으로 훌륭한 신발을 신도 계십니다.’ 하고 찬사를 보내 주리라.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장갑이 떨어졌어요.” 했다. 내려다보니 내 장갑 한 짝이 떨어져 볼품없이 밟혀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에끼 고이한 여자.’ 하는 원성이 입안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장갑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여인의 등에 날카롭게 꽂았다. 하지만 이내 원망의 시선을 거두기로 했다. 얼마 안 되는 동안이나마 내가 누렸던 착시의 행복은 나를 충분히 즐겁게 해 주지 않았던가.

짓밟힌 장갑을 주워 탈탈 털었다. 무릎 위에 남아있는 한 짝과 포개어 외투 주머니에 꼭꼭 챙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