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노혜숙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쳐다보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언제부터 녀석이 거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녀석의 등장으로 모처럼 즐기려던 오수의 꿈을 놓치고 말았다.
저 정도 안정감이면 다따가 뚝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의 기력이 쇠하거나 방심하여 떨어지는 경우도 예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위치에서 직선으로 떨어진다면 충돌지점은 누워있는 나의 코나 입술 언저리가 될 것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콧등이 근질거렸다.
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들어온 것인가. 제 아무리 고공비행에 능하다 할지라도 아파트 13층은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게다가 베란다의 촘촘한 방충망을 뚫고 들어온 걸 보면 꽤나 용의주도한 놈일지 모른다. 어쩌면 집단의 구속이 싫어 인간의 거처로 피신해온 건방진 아웃사이더는 아닐까. 미물 주제에 감히 인간의 실내까지 쳐들어와 그것도 천장에 달라붙어 위협을 가하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녀석과의 기 싸움이 심드렁해질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가 미주알고주알 수다로 길어지면서 나는 잠시 녀석의 존재를 잊었다. 그리고 몇 페이지 안 남은 책을 마저 읽기 위해 자리를 옮기면서 녀석은 한동안 내 의식 밖으로 사라졌다.
저녁 설거지를 할 때였다. 개수대에 둥둥 끈 검은 콩 껍질을 보는 순간 불현듯 녀석의 존재가 생각났다. 알맹이가 쏙 빠져나간 서리태의 퉁퉁 불은 껍질, 색깔이며 모양이 녀석의 물컹한 등짝과 닮아 있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장갑을 낀 채 거실로 달려가 녀석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등피에 느껴지는 탄력으로 보아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아서 제 갈 곳으로 가면 좋으련만 대관절 어쩌자는 것인가.
나의 곤충 학대 이력은 다양하다. 십수 마리의 개미를 한꺼번에 엄지손으로 비벼 죽인 일, 2.5cm 가량의 바퀴벌레를 파리채로 단번에 때려잡은 일, 나방을 휴지로 인정사정없이 압사시킨 일 등등. 그러나 이번에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쉰 줄을 넘기면서 성질이 눅은 것도 한 원인일 테지만 진짜 이유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르 잠자'였다. 왠지 거미는 혼자 쓸쓸하게 죽어간 그레고르를 연상시켰다. 이 엉뚱한 동일시는 소외된 인간, 필경 스스로에 대한 연민일 것이었다.
싸움도 길어지면 경계가 느슨해지는 법, 나는 녀석이 제법 만만해졌다. 느긋하게 앉아 9시 뉴스를 보기도 하고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의 폴더를 습관적으로 여닫기도 했다. 문득문득 녀석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상상으로 등이 가려웠으나 제 목숨 아까운 줄 알면 경거망동은 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다행이 녀석은 내 깊은 잠 속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천장을 확인했다. 어제 그대로였다. 슬그머니 자존심이 상했다. 태평하다 못해 의연하기까지 한 녀석의 태도 때문이었다. 사실 어제 녀석을 만난 이후 나는 은근히 그의 존재가 의식되어 뒤숭숭했던 것이다. 한낱 미물을 상대로 좌불안석이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간의 정황대로라면 녀석은 이틀째 금식 중인 게 틀림없었다. 우화등선의 소망을 품고 면벽수행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의 요지부동이 묘하게 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전전긍긍 녀석이 헛된 미망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순전히 나의 평안과 자유를 위해서임은 물론이었다.
녀석의 동태를 살피는 일도 흐지부지 흥미를 잃어가던 사흘째 아침, 마침내 녀석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흔적을 찾아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이 무슨 집착인가 싶게 수색은 철저했으나 녀석의 행방은 끝내 묘연했다. 알 수 없는 허망한 끝에 문득 죽비처럼 내려치는 한 생각, 미망에서 깨어날 사람은 바로 나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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