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사(佛影寺)에서 / 목성균
태백산맥을 넘어 불영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늦가을 짧은 해가 정수리를 넘어가 있었다. 깊어진 가을, 산사의 정취가 더욱 고즈넉한 때에 맞추어 도착했다.
스산한 바람에 집착執着처럼 매달려 있던 마지막 잎새가 지는 경내境內를 조용히 움직이는 여승들의 모습, 연못에 부처님의 모습이 비치는 불영사를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결혼 30주년 기념여행길에 들러 보기로 했던 것이다. 애마愛馬 '엘란트라'를 주차장 한 녘에 멈춰 세우자 영감이 한 분 달려와서 주차료를 내라고 한다. 주차료를 주면서 농담을 건네 보았다.
"영감님, 말에게 여물 한 바가지만 주세요."
영감이 무슨 소린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먼 길을 달려와서 마방馬房에 드는 지친 말에게 우선 여물바가지와 물을 주어서 원기를 회복토록 하는 것이 옛날 마방주인의 인심이었다. 국토의 등성마루를 아무런 가탈을 부리지 않고 숨을 고르게 쉬며 달려 넘어온 내 차가 기계라기보다 꼭 충직한 말 같아서 해본 농담인데, 관광지 인심에 절은 영감이 옛날 마방주인처럼 내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나의 취미는 여행이다. 우리 생활 형편으로는 과분한 취미여서 아내에게 늘 마음고생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이 하고 싶어지면 짐짓 '삶이란 엄청 환멸스럽다'는 듯한 침울한 표정을 짓고 묵비권을 행사한다. 경지에 이른 내 Pantomime에 아내는 참지 못하고 "도졌군, 또 병 도졌어…." 하며 음흉한 계략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가난한 여비를 마련해 주곤 했다.
물론 아내를 동반자로 하는 여행이 나의 희망이지만, 아내는 둥지를 못 떠나는 어미새처럼 죽지로 삶을 끌어안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의 무능을 보완하려는 반려자의 본능일 터인데 나는 아내의 천성이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늘 혼자 여행을 떠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아내를 강압적으로 내 옆자리에 태우고 여행을 떠났다. 하기는 아내가 내 강압에 굴복한 것이 아니고 결혼 30주년 기념이라는 여행의미에 여자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만 것인지 모른다.
불영사 입구의 아름다운 계곡에는 유감스럽게도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아름다운 냇물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어야 한다. 바랑을 진 여승의 조그만 몸이 늦가을 엷은 햇살 아래 징검다리를 조심스럽게 밟고 건너가는 탈속적脫俗的인 산수화 한 폭을 콘크리트다리가 깔고 앉아버렸다. 아쉬움이 남는다.
콘크리트다리 위에 서서 다리 아래를 본다. 냇물이 마치 잠투정하는 어린것이 어미의 젖을 물고 소롯이 잠들 때처럼 옹알옹알하며 여울목을 넘어 교각 아래 모여 정식靜息한다. 물속의 물고기들도 지느러미를 접고 조용히 물에 떠 있다. 냇물도 가을의 깊이에 따라 여위어 가는 듯 했다. 그 거울 같은 수면에 아내와 내 얼굴이 나란히 비쳤다.
"우리 약혼 사진을 보는 것 같은데…."
내 말에 아내가 감개무량한 미소를 지었다. 30년 전, 시골 사진관에서 사진사의 의도적인 농담에 수줍게 웃는 순간이 찍힌 빛바랜 약혼사진 생각이 나서 한 말이다. 그러나 수면에 나란히 비친 우리의 두 얼굴, 이미 많은 세월의 흔적을 깊이 새겨 놓았다. 어차피 결혼 30주년 기념사진에나 걸맞은 얼굴이었다.
다리를 건너면 길은 숲 속으로 나 있다. 조락이 끝난 숲은 깊이 가라앉아 적요한데, 나목들이 다가서는 겨울 앞에 내실內實의 무게로 담연히 서 있다. 아직 겨울잠에 들지 못한 다람쥐의 바쁘 움직임이 숲의 적요를 가볍게 흔들고 어디론지 간 뒤, 더 깊어진 숲의 적요에 나는 문득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익숙지 않은 짓을 당하자 숫처녀처럼 흠칫하며 "누가 봐요."했으나 손을 빼지는 않고 대신 걸음걸이만 다소곳해졌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불영사의 산문이랄 수 있는 둔덕진 숲길을 넘어서 호젓한 산기슭을 따라 내리막길을 걸었다. 손을 잡힌 채 다소곳이 따라오는 아내가 마치 30년 전 약혼 사진을 찍고 돌아오던 호젓한 산길에서처럼 온순했다. 어느 일요일, 애들을 데리고 대문에 페인트칠을 하라고 자백이 깨지는 소리를 지르던 중년을 넘긴 여인의 꺾인 일면은 흔적도 없다. 여행은 사람을 이렇게 순정純正하게 만드는 것인가.
절은 나지막하게 나려 앉으며 불영계곡의 물굽이를 틀어 놓고 멎은 산자락에 안겨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고 여염집의 아낙네처럼 소박하고 안존한 모습이 여승의 도량다울 뿐이었다.
절 앞에 불영사의 이름을 낳은 연못이 있었다. 부처의 모습이 비춘다는 연못도 가을 깊이 가라앉아서 면경面鏡같이 맑다. 연못 저편에 내외간인 듯 싶은 초로의 한 쌍이 손을 잡고 불영佛影을 찾는지 열심히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절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절 마당 들머리에 불사를 위한 시주를 받는 접수대가 차려져 있고, 어린 여승 둘이 엷은 가을 햇살 아래 서서 시주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여승 앞에 섰다. 여승이 합장을 하고 맞아 준다. 조그만 시주를 하고 시주록에 이름을 적었다.
두 여승은 앳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그레한 볼, 도톰한 붉은 입술, 크고 선연한 흰자위와 까만 눈동자, 가늘고 긴 목덜미의 뽀얀 살빛, 처녀성이 눈부신 아름다운 용모였다. 배코 친 파란 머리와 헐렁한 잿빛 승복이 나의 속심俗心)을 공연히 안타깝게 할 뿐, 정작 두 여승은 여느 소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밝게 웃고 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절을 돌아보았다. 조촐한 절이었다. 대웅전 중창 불사로 절 마당이 어질러져 있다. 오래 된 장맛처럼 깊은 절 집의 여운이 울어 나게 고색창연한 대로 놔두지 않고 절 재정이 좀 나아졌다고 참을성 없이 불사를 벌이는 게 아닌지-.
여승의 깊은 인상 때문일까. 고요한 승방 쪽을 자꾸만 기웃거렸다. 시주대 앞에 서 있는 여승들의 방은 어느 것일까. 방에 경대鏡臺는 있을까. 자신의 용모에 대한 애착도 홀연히 버리는 경지를 향해서 용맹정진할 어린 비구니에 대한 속인의 아쉬움이 가시지를 않는다. 화장은 안 해도 로션정도는 바를 것 아닌가.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가 대웅전을 향해 합장하고 절을 물러 나왔다.
나올 때 보니 두 여승은 불경을 외는지 염불을 하는지 삼매경에 들어 있었다.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 있는데 법열法悅의 상기上氣인지 노을빛이 물든 것인지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저 어린 여승들은 천진한 소녀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여승 곁을 지나 왔다. 마치 대웅전 본존 불상 앞을 지나는 마음 같았다. 아내도 내 심정 같은지 발끝으로 따라왔다.
절 앞의 연못까지 와서 나는 환상을 본 것 아닌가 하고 절 쪽을 뒤돌아보았다. 여승은 우리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새 절 안으로 들어가고 거기에 없었다.
연못의 벤치에는 초로의 부부가 아직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인생을 관조하는 듯 한 여유 있는 모습과 다정다감한 내외간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우리는 그들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방해하기 않기 위해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서서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연못을 들여다보아도 부처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엇다. 불영은 속진俗塵이 묻은 중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내 눈에는 안보이더라도 아내의 눈에는 보였으면 하는 바램이었으나, 아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비록 불심은 없는 사람이지만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남에게 못할 짓 안하고 산만큼 부처님은 잠시 현신現身을 해주셔도 무방할 것 같은데 부처님은 함부로 현신을 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산사에 어둠이 내리려고 했다. 초로의 신사 내외가 산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산골은 기습적으로 어두워진다. 절의 외등이 불을 밝히면 절의 모습이 막이 오른 무대의 세트처럼 생경한 모습으로 되살아나서, 승방 문에 등잔불이 밝혀질 것이라는 내 고답적인 절 이미지를 '착각하지마-. 하듯 가차없이 지워 버릴 것이다. 나는 아내를 이끌고 외등이 밝혀지기 전에 절을 떠났다. 적막해지는 절에 남는 그 두 여승이 혹시 절밖에 나와 서 있나 싶어 돌아보며….
우리 앞에 저만치 그 초로의 신사와 부인이 손을 잡고 어두워지는 고요한 산길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발걸음이 더 빠른 듯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들을 추월함으로 피차간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깨어지는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깊은 가을의 어두워진 주차장에서 말처럼 내 차가 적적하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차 곁으로 갔을 때, 저쪽 차의 사람이 우리 차 쪽으로 다가왔다. 먼저 도착한 그 초로의 신사 내외였다. 우리가 뒤따라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절에서 먼 빛으로 두 분을 지켜보았습니다. 다정다감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별 말씀을요. 두 분의 모습이야말로 참 보기 좋았습니다."
아내가 솔직하게 말했다.
"준비해 온 커피가 있는데, 우리 차로 가서 같이 드실까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분들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는데 아내가 얼른 친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쪽 차로 가서 보온병에 준비해 온 커피를 그분들과 함께 마셨다. 어두운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주차장이 너무 넓어 보였다. 가을이 깊긴 깊구나 싶었다. 주차료를 받던 마방주인도 가고 없다.
"우리는 백암온천으로 가는데, 가을이 깊어서 그런지, 동행이 그립네요. 방향이 같으시면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쪽 남자의 말이었다.
나는 깊은 감동으로 그분들을 바라보았다. 초면에 격의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이분들의 인품 앞에 나는 망연茫然했다. 이분들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한, 거리 유지가 실은 내 고즈넉함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인색한 거리였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에 주눅이 들었다. 단아한 인품이 엿보이는 그분들의 모습이 열심히 후학을 기르고 퇴직한 선생님 내외 같아 보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순수한 인간미와 기탄없는 마음의 자유, 이분들과 동행을 하면 좋은 여행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을 수학여행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이 인품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이분들의 격에 맞지 않을 경우 우리 피차에 불편이 될 뿐, 좋은 여행 동반자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백암온천 한번 가 본 곳이라서 덕구온천으로 갈 계획입니다."
"그러세요." 동행하고 싶었는데, 유감입니다. 그럼 좋은 여행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들이 먼저 출발하고 우리도 따라서 출발했다. 앞차의 빨간 미등이 따라오라는 선도의 눈짓 같았으나, 울진 외곽 삼거리에서 그들의 차는 백암온천 쪽으로 우회전을 하고 우리 차는 덕구온천 쪽으로 좌회전을 했다.
오늘밤은 덕구온천에서 자고, 내일 새벽은 동해의 어느 포구에서 밤바다의 오징어를 퍼담듯 잡아오는 어부의 자만심이 어떤 건지, 일출처럼 추켜세운 만선의 깃발을 보리라. 그리고 숙면한 포구 아낙네들의 목청이 생선처럼 퍼덕이는 어판장 모퉁이 좌판 앞에 앉아서 산 오징어 회도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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