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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박수칠 때 싸워라 / 이혜숙

박수칠 때 싸워라 / 이혜숙


 

 

드디어 우리 가정에도 여문 평화가 오려나보다. 자식들이 싸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가.

무슨 엄마가 자식 싸움을 바라느냐고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린 시절 치고받고 해야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해진다는 게 내 지론이다. 싸우다 보면 억울하고 분하고 미운 감정이 들 테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화해의 과정에서 한층 성장하고 끈끈해지는 싸움의 순기능 내지 싸움이 가져올 미래의 긍정적 방향을 생각해서 한 번 화끈하게 붙어보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남매의 터울이 다섯 살이다 보니 크는 동안 도무지 엉길 일이 생기지 않았다. 매사 야무진 누나와 느긋하고 꼼꼼하지 못한 동생이 어려서부터 누나의 훈계를 듣는 사이로 크더니 스무 살이 넘어서는 각자의 선을 긋고 마치 학교 선후배 관계처럼 지냈다. 내가 그런 느낌을 비칠 때마다 두 아이는 이구동성으로 이만하면 우리 다정한 거야. 잡아먹을 듯 싸우고 아예 말도 안 하는 친구들도 많은데하면서 우애를 과시하곤 했다.

다행히 소원하던 그날이 왔다. 동생이 말 끝에 누나가 아닌 라는 호칭을 쓴 것이 발단이었다. 제 딴엔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어린애 취급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겠지만, 누나의 충격은 컸다. 부들부들 떨었다.

첫 싸움을 관망하는 내 반응은 흐뭇함, 그 자체였다. 드디어 너희들이 추억을 만드는구나. 바람직한 현상이로다.

그런데 한 번 라고 트고 나더니 언어의 수위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음 번에 아들이 !”라고 해서 주말에만 오는 딸이 도착하자마자 도로 가버리겠다며 분을 참지 못했다. 딸을 만류하고 사과시키는 것으로 두 번째 싸움도 넘어갔다.

무엇이든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것. ‘미래의 긍정적 방향은 점점 길을 잃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세 번째 싸움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편이 될 줄이야. 누나가 애완동물의 앞 글자로 시작하는 한방을 날리자, 동생은 기다렸다는 듯 비타민C 소스를 끼얹어 돌려주는 게 아닌가.

싸움도 때가 있는 법. 너무 늦게 시작한 싸움에 순기능은 무슨.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나는 이러다 영영 둘이 등을 돌릴까 봐 걱정이었다.

아들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말했다.

넌 누나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욕을 해서는 안 돼.”

?”

네 큰외삼촌도 그랬어.”

아들은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딴엔 억울할 것이다. 엄마의 비논리적인 권고도 어이없을 것이다. 나는 큰동생하고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창과 방패삼아 싸우긴 했어도 동생이 내게 욕을 한 기억은 없다. 그리고 그 동생이 지금까지도 가장 깍듯하게 누이 대접을 해준다. 그게 막가파집안과 다른 점이다.

아직도 입이 부어 있는 아들에게 넌지시 한마디 더 얹었다.

지난여름, 너희 싸우던 날이 누나 생일이었다는 거 알아?”

한참 후 아들은 누나에게 너라고 하는 친구가 부러웠던 거였는데혼잣말처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슬며시 웃음이 딸려 나왔다. 우리 집 남매의 싸움은 그날로 유통기간이 마감이 되었을 것이다. 나의 작은 바람은 이루어졌고, 저희들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접착제가 둘 사이를 강력하게 붙여줄 것이다.

나는 닫힌 아들의 방문 앞에서 혼자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