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강 흙바람 / 김길영
큰할아버지의 가족사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 일이거나 기억하기 어려운 어릴 적 일이다. 친척들의 전언과 여러 참고문헌을 토대로 흐름을 맞춰보았다.
큰할아버지는 고부에서 이사 온 전봉준과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동학농민혁명거사 때는 김개남. 김덕명. 최선경 등과 함께 전봉준의 참모 역할을 충실히 했던 주요 인물 중 한 분이셨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터전삼아 살던 농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일어선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 봉기초기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의기충천했으나 군의 조직을 갖추고 훈련받은 관군과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성군을 모시고 배고픔을 면해보려던 순수한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기존질서에 반기를 들고 혁명하여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다. 동학농민군이 실패로 돌아가자 혁명에 가담했던 삼남지방의 30만 명에 달하는 농민군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렸다. 어느 싸움에서나 패자는 응분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혁명군 핵심인사들은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혁명에 가담한 대부분의 농민들도 목숨이 붙어 있을 뿐,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대부분의 혁명군은 생활 터전을 잃고 떠돌이처럼 흩어졌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생활이 어렵더라도 가문의 명예를 중히 여겼던 그 시절, 가슴 아팠던 것은 자손 대대로 역적의 멍에를 메야 했기 때문이다.
1862년에 봉기한 진주민란도 지역적 반발이 아니었다. 왕조의 부패와 지방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에 집단적으로 항거한 항쟁이었다. 부패한 왕조는 안팎으로 물이 새었다. 그 후, 30년 뒤 참다 참다 지친 농민들이 죽기 살기로 봉기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밥그릇을 지키려는 가장 원초적인 발로였다. 자기 숟가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참지 못해 대든 것이다.
우리들의 상식으로 판단할 때 참을 수 없는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우리들의 유전자 속에는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을 그을 줄 안다. 부정한 짓에 항거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적의 굴레를 쓰고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어 역적이 되고 가난을 물려받아야 했는지 모르겠다.
내 조국의 허약한 왕조는 일제에 강점당했다. 치욕의 36년을 견뎠다. 어렵게 되찾은 광복의 기쁨마저 얼마가지 못했다. 치안이 확립되지 못한 건국초기에 학습되지 않은 사상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좌우로 편을 갈라 부모 죽인 원수처럼 싸웠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큰할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역적의 자식이 된 당숙은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살았다. 멸시받고 배고팠던 그에게 사회주의는 희망의 불빛이었을 것이다. 그가 기회를 놓칠 리 만무다. 그는 곧 사회주의 붉은 물이 들었고 지하당조직에서 간부가 되었다.
그가 속한 지하당 무리들은 헐벗고 소외된 농부들을 부추겨 시위를 벌였다. 내 유년시절에는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었다. 벌집 쑤신 벌떼처럼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들이 홀대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그들에게는 대반전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시위 때마다 경찰이 동원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언제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지만 몇 대의 트럭에 분승한 촉성회 회원들이 진압에 가담했다. 잡혀온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뭇매를 맞았다. 내 어릴 적 잔상에는 살육의 현장 같았다. 누가 무엇을 잘하고 못했는지 내가 알 길이 없었다. 새 세상이 온다는 유언비어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시퍼런 칼을 숫돌에 갈면서 후일을 도모했을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이 활동하던 지하당조직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으로 얼굴을 내밀고 팔뚝에는 붉은 완장을 찼다. 역적의 자식으로 고통과 비웃음이 몸에 밴 당숙도 서슬 퍼런 권력을 손에 쥐고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붉은 권력도 국군의 대 반격으로 오래 누리지 못했다. 당숙도 짧은 권력을 놓치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산속으로 숨어들었으나 죽음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죽음은 곧 모질게 살아온 한 인생의 마무리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세상사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연좌제란 사슬이 육촌들의 발을 다시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의義의 깃발을 들고 동학농민혁명 거사에 합류한 큰할아버지의 행장을 내가 함부로 들먹일 수 없다. 붉은 완장을 찰 수밖에 없었던 당숙의 행적도 무어라고 언급할 수가 없다. 역적으로, 역적의 자식으로, 좌익분자로, 좌익분자의 자식으로 대를 이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척박한 토양이 문제였다.
2006년 국회가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증손과 고손까지도 동학농민혁명군의 유족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사료를 탐독해 보았지만 남아 있는 기록문서 어디에도 큰할아버지 함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전봉준이 가명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보면 큰할아버지도 가명을 사용했으리라는 믿음이 전부일 뿐이다.
허물어진 가문과 찌든 가난을 물려받고 어깨를 펼 수 없었던 그들에게 특별법이 위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학교에서 ‘동학’을 배울 때는‘동학란’이었다. ‘난’이 ‘혁명’으로 바뀌었다고 그들의 슬픈 비밀을 다 찾아 안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혀가고 있다.
삼십 만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예들이 역적의 자식으로 또 연좌제로 묶여 산 세월이 한 세기가 넘는다. 긴긴 세월 동안 흙바람 일던 동진강은 황톳물과 핏물로 몸살을 앓았다. 오늘도 동진강은 말없이 흐른다. 한 세기 넘도록 피멍든 사연을 다독이며 흘러간다. 그 역사 속에 우리 당숙의 경우와 유사한 비밀을 가진 가족사가 얼마나 많겠는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아온 그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이제라도 동진강기슭에 감춰진 수많은 사연들을 끄집어낼 일이다. 뿌리 깊게 반목하며 살아온 뼈아픈 역사를 세상에 알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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