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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허(虛) / 이금태

허(虛) / 이금태

 

 

 

빈집의 슬픔을 아는가. 배꼽을 닮은 그곳에 쇠붙이를 찔러 넣는다. 딸깍 금속음 소리에 녀석은 꼬리가 떨어질듯이 흔들어댄다. 반갑겠지. 하루 종일 홀로 있었으니, 충성스런 사랑마저도 피곤한 느낌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현관 앞 신발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리며 내 향취를 제 입속 가득 넣을 모양이다. 멀리서서 녀석의 하는 짓을 생각 없이 바라본다. 여기저기 놓여진 사물에 어둠이 내려와 앉는다. 어둠과 적요에 몸이 떨린다.

대추나무와 석류 꽃잎들이 피었다가 무수히 꽃잎을 떨군다. 꽃들이 제때에 사랑을 나누었는지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동그랗게 알이 맺혔다. 좁은 마당에 서로 몸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나무도, 어둠의 그림자에 자신을 감춘다. 담 모퉁이에 세워진 가로등 빛이 보름달 같이 밝아진다. 불빛에 나뭇잎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리모컨을 찾아 티브이를 켰다. 빛에 눈이 부신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혼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아이가 돌아올 시간인데 오늘따라 아이가 늦는 것 같다. 손 모양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놀이를 해본다. 두 손을 오그리고 하트도 만들고, 말도 만들고 개도 만들었다. 원하는 대로 그 모양은 변했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있구나.

이맘 때였던가 싶다. 감꽃목걸이를 만들며 골목길을 누비던 어린 시절,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없었다. 공깃돌 놀이도 지겨웠고 고무줄놀이도 시들했다. 불현듯 무섬증이 몰려와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렸다. 양철지붕사이로 스며 나오는 이웃집들의 불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밤이 이슥해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손에 있는 보퉁이는 그득했다. 떨이하는 푸성귀며 생선들을 시장에서 샀을 것이다. 따오기가 입 속에 새끼들이 부리를 넣으면 창자 속까지 긁어 먹이듯, 어머니는 아귀같이 먹어대는 자식들의 속을 채우는 것도 버거웠으리라.

나의 무의식속에 무엇이 되어 남았기에 아직도 그 일은 종종 꿈에 나타나는 걸까. 가물어서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우물 안에 고개를 디밀고 하루 종일 노래를 불렀다. 공명을 울리던 그 소리는 실제보다 더 잘 부르는 것처럼 들렸고 메아리가 되어 내 귀를 울렸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곤 "엄마야 누나야"를 불렀고, 얼음 같은 겨울하늘을 쳐다보며 "따오기"를 불렀다. 그 꿈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눈물이 번져 있었다.

텅 빈 하늘에 사랑을 잃고 쫓겨 난 그믐달 같다던 달이 홀로 떠 있다. 별들은 다 어디 간 걸까. 그 어둠을 가로등이 어루만져 준다. 거리로 나섰다. 주인이 찾지 않는 집들이 즐비하다. 불 꺼진 창은 적막을 안고 있다. 이따금 지나는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골목어귀 구멍가게 평상에는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앉아있다.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젊은이를 기다리리라. 무심한 사람들. 이마 맞대고 살아가던 단칸방이 그립다. 두리반 상에 빼곡이 앉아 젓가락 싸움 하던 시절, 언감생심 독립된 공간을 갖기란 어려운 때이다. 없이 살아도 행복했던 날들이다.

찾을 수 없는 세월을 사다리 타고 더듬는 버릇이 있다. 포기하면서 많은 날들을 살았다. 배움에의 목마름은 포기했고 욕망의 불덩이인 육체를 포기했고, 친한 벗들을 포기했다. 포기하는 일은 쉬웠지만 다시 얻기는 어려웠다. 잃어버린 시간들이다. 빨아들일 듯이 요염한 장미꽃을 보아도 아름다움을 모르고 여행하는 즐거움도, 사랑조차도 관심이 없었다. 지독한 공허증空虛症을 앓고 있었다. 이 허증을 시간은 스스로 치유할 능력을 주었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어느 시인은 이렇게 가르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것은 낡은 육신뿐일까? 아니다 도리질을 친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착한아이와 남의 일을 염려해주는 이웃이 있다. 요즘에서야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나 아닌 타인을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세상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골목길이 밝아진다. 집 안에 불이 밝혀져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한껏 기분이 좋아지리라. 아이가 좋아하는 찌개를 올려놓았을 뿐인데도 진수성찬이나 차려 놓은 듯 기분이 좋아진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이때다. "엄마!"

터벅거리던 발소리가 힘찬 걸음으로 바뀌면서 아이의 목소리가 한 발 앞서 어미 품을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