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행복 / 이시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누군가가 애써 가꾼 야채 몇 가지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시장보따리를 풀어 깻잎을 보면 지나간 기억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든다. 입덧이 유달리 심했던 첫아이를 가졌을 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음식물을 토해내며 밥을 먹지 못했다. 견디기 힘든 입덧을 참아 가며 모성의 싹을 키우기에 급급했던 나에게 친정어머니는 손수 채전밭에서 키운 깻잎으로 김치를 담아 보내셨다. 어머니의 정성이 닿아서인지 그 김치는 유일한 반찬으로 조금이나마 입덧을 덜게 했다.
그 해 이후 식구가 불어난 내가 친정에 갈 때면 으레 비닐봉지 속에는 갓 따온 깻잎들이 소복이 담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정성을 하나 둘씩 포개어 딸을 따라보낸 후에도 마음 속에 몇 뭉치의 깻잎을 더 포개고 계셨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가족들도 깻잎 김치를 좋아한다.
지난 여름 더위가 한창인 저녁이었다. 이웃인 혜정엄마가 아파트 옆 가로수 길로 산책을 하자기에 함께 나섰다. 산책로 옆 공터에 아파트 주민들이 일구어 놓은 채전밭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자태를 드러내 보였다. 잘 가꾸어진 들깻잎이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둘은 들깻잎이 무척 맛있어 보인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시장바구니의 무게까지 들먹이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몇 발짝 앞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풀을 뜯어 모아 거름을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들뜬 목소리를 들었는지 깻잎을 따가라고 했다. 마침 시장에 들러 몇 번이고 벼르기만 한 채 깻잎김치를 담그지 못한 터였다.
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깻잎을 따기 시작했다. 연한 잎들이 자근자근 소리를 내며 손 안으로 옮겨졌다. 비싸기만 할 뿐 몇 장씩 묶여 있던 뻣뻣한 깻잎과는 사뭇 달랐다. 밭 주인이 쏟은 정성과 사랑이 그토록 푸르름과 유연함을 갖게 했을 것이다. 깻잎을 따는 재미는 솔솔 했다. 어느새 옷자락에 쌓인 깻잎은 작은 항아리를 채울 것 같았다. 며칠 전 깻잎을 찾던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맛있는 김치는 식탁에서 화기를 더하는 듯 했다. 옆 아파트에 산다는 할아버지는 즐거워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약도 치지 않은 무공해 식품이라 맛이 좋다고 자랑을 하며 많이 뜯어 가라고 했다. 애써 지어 놓은 농사를 수확해 가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척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곳을 알려 드리며 한 번 놀러 오시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오려는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약을 쳤대요……, 버려야 한대요……."하는 혜정 엄마의 볼멘 목소리와 함께, 밭 저쪽에서 누가 깻잎을 따 가느냐는 퉁명한 할머니의 음성이 바람을 가르고 다가왔다. 언제 농약을 친 줄 알고 남의 밭에서 깻잎을 따느냐는 날카로운 음색이 귓전을 때렸다.
따 모은 깻잎을 손에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와 나는 짧은 순간 눈빛을 교환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밭이랑에 따 모은 깻잎을 모두 내려놓았다. 미안한 듯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뱉아 내는 할아버지의 잔기침 소리를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손에서 농약냄새는 나지 않았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가족들의 식탁을 위해 부지런히 밭을 가꾼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친정 나들이를 할 때 소담스럽게 가꾸어 놓았던 어머니의 채전밭이 어른거렸다. 친정어머니가 내게 보내던 정성을 닮은 할머니의 김치 항아리를 기다리는 어느 집 냉장고에 빈자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무료한 하루 해를 채소를 가꾸며 지냈을 것이다. 풀 한 포기를 뽑아내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채소를 바라보며, 어린 손자들의 자라남을 지켜보듯 노년의 외로움을 달랬을지도 모른다.
노력도 없이 기쁨에 젖어 무례함을 범한 것이다. 할머니의 행복을 훔친 죄스러움이 회색 빛 기억으로 침잠 되었다. 나는 베란다의 작은 화분 하나에도 어느 강가에서 주워온 돌멩이 하나까지도 얼마나 많은 마음을 담고 살았는가. 내가 낸 자국에 남은 상처를 보듯 밭 언저리에 머물던 마음은 뽀오얗게 내린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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