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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양탄자에 관하여 / 박지평

양탄자에 관하여 / 박지평

 

 

 

고니, 백조의 순우리말이다. 곤곤하며 운다고 고니라 지었다지만 그가 지닌 덕성만큼 아름다운 이름이다.

아무라 호수 위, 수고니가 엉거주춤 앉아 있다. 자맥질도 날아오르지도 못한 채 여러 날이다. 산란을 한 어미 고니가 알을 부화시킬 동안 아비 고니는 자신의 날개 깃털을 뽑아 길 위에 양탄자를 깐다. 갓 태어난 새끼가 밟고 갈 카펫이다. 그 깃털은 어느 명공의 솜씨보다 고르게 딸려, 둥지에서 호수까지 갈 동안 새끼들은 발바닥에 조금의 상처도 내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고니는 조류 중 유일한 채식주의자다. 호수 속 물풀리 주식이건만 아비 고니는 이제 생존을 위한 물질마저 어렵게 됐다. 아무리 그런들 위풍당당하게 보여야 하는 경계태세까지 늦출 순 없다. 낙조와 함께. 뜬 눈이 호수에 잠길 때까지, 차가운 물 위에서 보초를 선다. 날개옷이 없다 보니 몸은 추워오고 기력은 떨어진다. 모성이 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지만, 존재 자체로 수비가 되는 수고니의 마지막 삶은 너무 명상적이라 가슴 저미는 연민이 솟는다.

칭하이 무상사는 세계적인 인도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다. 그녀가 찍은 사진 중에는 야생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많지만,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수고니와 그 새끼들이었다. 보복도 강직함도 없는, 오로지 따뜻함과 부드러움만이 넘치는 그 광경은 바람 맑은 산사에 온 듯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기도 했으나 자연이 망가지는 슬픔 또한 감내해야 했다. 간절한 것이 죽어 하늘에 오르면 대낮에도 눈 못 감는 낮달이 된다고 하지만, 수고니의 넋만은 인간에게 내려져 혼 굿처럼 무대 위의 춤과 노래가 되어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지는 것 같다.

고니는 일평생 한 배우자를 고집하나 다른 새의 입양만은 서슴없다. 공존의 조화로움을 익히 알고 포용과 양보로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NQ는 이기심으로 남을 헤치지 않는 대신, 남을 위해 내가 희생하는 지수다. 고니는 NQ가 조류 중 가장 높은 20%. 호랑이와 사자가 덩치와 무관하게 4%인 데 반해 소가 40%인 점은 수긍이 간다. 부지런한데다 성냄도 욕심도 없는 소의 덕성은 그래서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인간이 듣게 한다. 사실 인간의 덕성은 극소수만 90%고 다수는 3%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균 잡아 10%라니 예수나 부처 등 거울을 닮은 성자가 많기를 갈망하다가도 슬그머니 스스로 마음 밭으로 눈길이 돌려진다.

5월 어느 날이다. 꽃향기 눈부시던 그날 우리는 모처럼 들놀이를 가기로 했다. 이웃 엄마들과 함께였다. 출발하기 전, 전화가 왔다. 조금 늦는가 보다 하며 기다리던 선주 엄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조금만 건드려도 통곡으로 변할 듯 아슬아슬했다.

"개가, 우리 집 도리가……."

"도리가 어찌 됐는데요?"

"어저께 차에 치이지 않았겠어요. 토요일이라 수의사 불러 척추수술을 했는데요. 밤에 얼마나 앓는지요. 그래서 아침에 의사를 다시 불렀더니 안 되겠다며 안락사를 시키자 하더군요. 도리를 묻은 후 봉분에 잔디 입히고 나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집안에 초상이 났는데 제가 어찌 놀이를 가겠어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린다. 달리는 차 안에서 들은 대로 들려줬더니 한 엄마가 말을 받는다.

"손해가 크구먼. 수술까지 했으니 병원비만 해도 수월찮게 나왔을 게 아냐? 개장수 불러 얼마라도 받고 팔아넘길 일이지. 산에 가 땅 파랴. 놀이 못 가. 그 많은 돈 개 죽 쒀줬네. ……."

살아가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보니 생각의 차이도 엄청나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는 할 수 없으나 평균 덕성지수 10%인 인간의 비극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다. 묻혀 썩힐바엔 인간을 위해 보시를 했다고 그 갠들 행복해 할 게 아니냐며 그녀가 덧붙였지만, 나는 혼란스러웠다. 정성스레 잔디를 다독이는 손길 위로 지폐를 거머잡는 다른 손이 떠올랐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그 생명을 담보로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본색에 가까운 인간다움인가를 저울질하기는 어려웠다. 자기 삶의 밖에 있고,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아무렇게나 말한다고 그녀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마음이 가물다. 비정하다며 몰아세월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고귀한 품성 10%뿐인 인간덕성의 가난은 그곳에도 산채해 있었던 거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누군가가 깼다. "이상하다, 도리는 안됐지만 선미 엄마를 생각하니 와 이리 푸근하노."

그랬다. 마음을 두고 하는 이들의 생명에 대한 사랑은 남이 봐도 훈훈하다. 아무런 계산 없이, 언젠가는 사라지는 유한에 대한 쓸쓸함, 그 나그넷길을 동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자기 삶을 보는 것 같은 연민을 느낀다. 풀과 하찮은 벌레까지 자비의 시선으로 보며 살뜰히 보듬는 그들을 보면, 우리 내면의 가볍고 들뜬, 소란스러움이 고즈넉이 다독여지는 느낌이다.

어머니의 계절이었다. 차창 밖의 5월은 밝고도 상큼했다. 물질주의를 이기게 하지 않는 하나의 울림이 된 '푸근하다'란 단어는 그때까지 착잡한 마음속에 있던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것은 우주가 내보내는, 생명의 진동이었다.

잔디 위의 손길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따스했을 손길이다. 순간 그 잔디 역시 양탄자라는 생각에 이른다. 인간의 손끝과 새의 부리로 만들어졌을 뿐, 그 양탄자들은 더없이 아름다운 덮개와 깔개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지구상에 그만한 이부자리가 더 있을 성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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