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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가르치는 선생, 가리키는 스승 / 곽흥렬

가르치는 선생, 가리키는 스승 / 곽흥렬

 

 

 

어쭙잖은 지식으로 남들 앞에 서 온 것이 서른 해가 넘었다. 어린 학생들 앞에도 섰고 어른 학생들 앞에도 섰다. 어린 학생들 앞에 서서는 교과 공부를 가르쳤고 어른 학생들 앞에 서서는 글쓰기 공부를 가르쳤다.

같은 일을 계속 하다 보면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는 것일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수십 년 세월 동안 한결같이 가르치는 일로 지내다 보니 이 가르치는 습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몸에 배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한사코 가르치려고 했었다.

"선생질 하는 며느리 봐놔 보래. 아무한테나 대놓고 가르치려 든데이."

모임자리에 가면 간혹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 마땅히 시중을 들어 드려야 하는 시부모에게조차도 시중은커녕 되레 가르치려 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어디 꼭 교사며느리뿐이겠는가.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습득시켜야 하는 일을 업으로 가진 이들이라면 다분히 그럴 개연성을 안고 있다. 그들이 천성적으로 그런 자질을 타고났다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버릇으로 굳어져서 자연스레 그리 되는 것일 게다.

"사람들은 배우는 것은 좋아하지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일찍이 미국의 노예해방을 부르짖었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남긴 명언이다. 사람은 누구 없이 스스로 익혀서 아는 것은 좋아하지만, 남의 명령이나 속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싫어한다는 뜻이 아닐까. '하던 xx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는 말이 있다. 타인의 간섭이나 지배 받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선험적인 기질을 잘 대변해 주는 속담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당연히 행해야 할 옳은 일일지라도 누가 시키면 공연히 트집을 잡고 어깃장을 놓게 마련이다.

'가르치다'가 지시하고 명령하는 행위라면 '가리키다'는 안내하고 권유하는 행위일 터이다. 곧 전자가 타율에 기반을 두고 있는 데 비해 후자는 자율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나 할까. 이것이 자율과 탸율의 결정적인 차이다. 그러기에 가르치는 것보다는 가리키는 것이 분명히 고차원이고 고품격임에 틀림없다.

가르치는 일이 선생의 상이라면 가리키는 일은 스승의 상이다. 지식의 단순한 전달자가 선생인 데 반해, 인생의 친절한 안내자가 스승인가 한다. 가르친다는 행위에는 그 안에 상하관계가 깔려 있고, 가리킨다는 행위에는 그 속에 수평관계가 흐르고 있음에서다.

흘러간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여태껏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에만 충실하려고 안달했었지가리키는 스승으로서의 행실에는 등한시해 온 나날들이었다. 진즉에 내 자신의 깜냥을 헤아렸더라면 이런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을.

지나고 나서야 알량한 식견이나마 돌아나 때늦은 후회감이 밀려든다. 깨달음은 이렇게 늘 지각성으로 찾아오는 것인가 보다. 한 해 두 해 나이테가 감기어 가면서 이제서나마 사람살이의 이치를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잔뜩 먹어 온 지금의 나이가 그저 헛먹은 것만은 아니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늦었다고 할 때가 빠르다는 말이 있던가.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교육자가 아니라 어디에론가를 가리키는 안내자가 되어 보련다. 아니, 인생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그들과 나란히 길을 걸어가는 동행자의 역할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겠다. 마라톤 경주에서의 페이스메이커 같은 마음가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