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도 없이 / 윤정혁
샤워를 끝내고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다가 막내 생질서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영문을 따져 물을 여유가 없을 만큼 저 쪽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변을 당했다면 그 흔한 교통사고려니 지레 짐작을 한다. 박서방이 올해 몇이던가.
문상을 가야겠구나 생각하면서 옷을 챙겨 입고 전에 다니던 직장동료들과 점심약속이 된 식당으로 나간다. 식사 중에 이순을 맞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뜬 선배나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암으로 투병중인 M씨를 걱정한다. 식사를 마치고는 차에 기름을 채운 후 지난 주 흙탕길을 다녀오면서 더러워진 차를 씻고 구두를 닦는다.
오후 네 시 경의 병원 장례식장은 조문객도 뜸하고 썰렁하다. 예상과는 달리 생질서의 사인은 심장 가까운 쪽 동맥혈관 파열이라고 한다. 육척이 넘던 망자보다 몸집이 커 보이는 그 아버지의 돌아앉은 어깨가 천근으로 보인다. 자식의 부재를 인정하는데 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인지. 옆 자리의 두 생질서에게 평소에 몸 관리를 제대로 하라고 나무라듯 당부를 한다.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소를 흘린다. 살아있는 자들은 그가 생전에 얼마나 성실한 남편이었으며 아버지였는지를 이야기한다. 망자에 대한 애도는 이내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묻힌다. 죽은 자는 곧 잊어질 것이다. 두어 시간 앉았다 약속을 핑계로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뜬다.
근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이런저런 저녁약속이 줄을 잇는다. 나이 든 사람들이 만나면 필요이상의 몸짓으로 떠들고 소리 내어 웃는다. 공허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양껏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그러다보면 조금씩 기분도 부풀어 오른다. 그런 허황한 몸짓이 버거운 일상을 잠시나마 잊고자 하거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인 것처럼 보여 서글퍼진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다. 아내가 없다. 곧 출산하게 될 며느리의 산후바라지를 위해 출국하는 안사돈을 배웅하러 인천엘 갔다. 간 김에 서울의 딸아이 둘도 만나보고, 사나흘이 지나야 올 것이다. 둘이 살던 집에 잠시 하나가 없다고 해서 이토록 서늘한 기운이 돌다니, 집은 사람의 체온이 빠지면 이내 콘크리트 구조물로 돌아간다. 사월의 끝자락인데 날은 왜 이리 찬가.
거실과 안방의 등을 모두 밝힌다. 난방 스위치를 돌려 보일러를 가동시킨다. ‘따뜻해 져라, 어서 빨리 따뜻해 져라’ 몸이 따뜻해지면 허전함도 가시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대충 씻고 내의를 갈아입은 후 자리에 든다. 늘 그렇듯이 수십 마리의 매미가 일시에 떼 서리로 울어 젖힌다. 오륙년 전부터 들리기 시작한 이명이다. 언젠가는 이 소리도 안 들릴 날이 있을게다. 과음한 탓인가, 머리가 뻐개지듯 지끈거린다.
TV를 켜고 한 시간 쯤 뒤에 꺼지도록 타이머를 작동시킨다. 서해 어디에서 꽃게잡이 어선이 전복하여 어부 몇 명이 죽고, 부산 어딘가에선 큰 불이 나서 또 몇 명이 죽었다고 한다. 잠시 죽은 박서방이 보이고 내가 그에게 어떤 사람이었을 지가 걱정된다. 생질서와 그가 남긴 아이들의 모습에 내 아내와 자식들이 차례로 오버랩 된다. 죽음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내게 올 것인지 두렵다.
전화벨이 울린다. 독일에 사는 아들놈이다. 방금 구삭동이 딸을 얻었다는 기별이다. 바삐 가는 자가 있더니, 이 밤중에 서둘러 오는 생(生)도 있구나. 이 땅에 생명을 보내고 거두어들이는 일은 그 분의 일이어서 감히 참견할 일은 못 되지만 선뜻 납득이 안 되는 일도 더러는 있어서 의아해 한다. 인큐베이터 속의 아이를 생각한다. 그 아이의 앞날이 밝고 따뜻하기를, 가슴이 따뜻한 아이로 자라기를 갈망한다. 그 동안 주제넘게도 많은 것을 바랬다. 용서해 주시겠지. 너무 빨리 방안 공기가 더워져 보일러 스위치를 끄고 다시 눕는다. 잠들 무렵 이따금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절절한 열망도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은 나를 더욱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한다. 한창나이에 뜬금없이 죽는 사람이 수도 없는데 이 나이까지 살아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자지러지는 매미소리에 휩싸여서 나는 서서히 심해로 가라앉는다.
이틀 후, 아내가 귀가한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기척이 없는지라 어디 나들이라도 갔나 하고 핸드백 속의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딴다. 평소 신던 남편의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 양반이 장난을 치나' 안방 문을 연다. 남편이 반듯이 천정을 보고 누워있다. 여자의 육감이라는 것이 벌떡 일어선다. 119응급구조대를 부르고 나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다. 의사는 나의 눈을 까뒤집고 후래쉬를 비춰보고, 체온을 측정하는 따위의 일들을 습관대로 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을 안다. 그는 챠트를 들척이며 아내에게 나의 사망원인을 수면무호흡증에 의한 심장마비인 것 같다고 애매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게 죽었다. 나는, 준비도 없이.
'수필세상 > 좋은수필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인생의 사다리 / 김우종 (0) | 2020.02.25 |
---|---|
[좋은수필]삶의 빛깔 / 조재은 (0) | 2020.02.24 |
[좋은수필]좌우명(座右銘) / 김형석 (0) | 2020.02.22 |
[좋은수필]봄이 오는 마당에서 / 심명옥 (0) | 2020.02.21 |
[좋은수필]떨켜離層 / 노덕경 (0) | 2020.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