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사주 / 이숙희

 

사주 / 이숙희

 

 

잠결에 화들짝 눈을 뜬다. 고통에 짓눌린 듯한 남편의 신음소리 때문이다. 나의 부스럭거림에도 남편은 기척이 없다. 꿈인가?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평소의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코밑에 손등을 대어보고 가슴에 귀를 대어보아도 아무 느낌이 없다. 남편을 흔든다. 그제야 남편은 "왜 그래?" 하며 돌아누워 계속 잠을 이어간다.

신혼 초의 일이었다.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승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부모는 나를 낳았으되 나를 키워주지 못하고…….”로 시작하여 조실부모한 남편의 사주를 줄줄 뱉어내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금세 남편의 사주임을 알 수 있는 것을 나의 얼굴에서 읽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했다. 누가 들을까 봐 부끄러웠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얼른 중년 남자를 집안으로 들였다. 그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 안타까운 얘기지만 새댁 남편이 단명할 사주구만. 서른일곱과 서른아홉을 조심해야겠어. 그리고 남편의 사주에는 아들이 없겠어."

어제 그제 시집와 겨우 첫돌을 갓 지난 딸을 둔 나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세상이 무너진 듯 나는 그 남자의 말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실체도 없고 검증도 되지 않는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불안해졌다. 점점 늪으로 함몰되어가는 불안감에 그러면 내 사주를 한번 봐 달라고 했다. 혹여 내가 과부 팔자거나 내 사주에도 아들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중년 남자는 과부 팔자도 아니며, 나의 사주에는 아들이 둘이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과도 같았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다. 나는 당돌하게 말했다.

“부부는 동체라 했으니 아내인 내 사주로 백년해로하고, 아들을 낳으면 될 테지요.”

그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듣고 난 후 아무리 무시하고 잊어버리려 해도 꺼림칙한 마음은 영 가시지 않았다.

첫돌을 지나 아장아장 걷는 딸을 데리고 어느 한의원으로 들어섰다. 임산부의 태아 감별에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한참 동안 진맥하던 한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둘째도 딸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중년 남자가 말해준 남편의 사주는 내 몸과 마음을 완전히 메우고 있었다. 산통이 시작되었다. 연달아 딸을 낳는다고 생각하니 슬며시 어떤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불안으로 몰아넣었던 남편의 사주가 다 헛되었음을 증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산통을 겪은 후 산부인과에 갔다. 낳아보니 아들이었다. 사주와 진맥의 예견이 맞지 않음을 알고 날아갈 듯 기뻤지만, 그래도 남편의 단명에 대한 찜찜함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았다.

당사자인 남편에게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혹여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을지도 모를 자기암시와도 같은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두려웠다. 늙어 할머니가 되어도 좋으니 어서어서 그 나이가 지났으면 싶었다. 남편의 귀가가 늦으면 온갖 방정맞은 생각으로 마음속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작은 선행도 남편을 지향한 기도가 되었다. 설거지나 청소나 빨래를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사주를 이겨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였다. 가슴이 벅차오는 기쁨도,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도 반만 표현하며 살얼음 위를 걷듯 했다.

이제 남편의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있고, 얼굴에는 주름이 한 겹 두 겹 쌓였다. 어서 가버렸으면 했던 세월도 훌쩍 넘어 몇 곱절이나 지났다. 이 세상에 머무르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을 진데, 나는 그 사주라는 굴레에 씌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늘 노심초사하였다. 어쩌면 불치병으로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남편을 둔 아내처럼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영원한 이별을 두려워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긴 세월 동안 내 삶을 완전히 포박했던 그 한마디도 이젠 어렴풋한 전생의 한때인 듯 멀어져 갔다. 돌이켜보면 사주를 봐준 중년 남자를 탓할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 한마디가 나를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삶을 살도록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전등을 끈다. 사위가 온통 어두움 속이다. 촛불을 댕긴다. 남편은 조용히 장궤하여 묵주기도를 한다. 은은한 불빛에 비친 남편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초연한 얼굴에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같은 신앙을 가지고서도 신께 완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사주라는 민간신앙으로 불안에 휩싸였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무한의 믿음으로 오로지 빛을 향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