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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귀로 보고 마음으로 듣다 / 피귀자

귀로 보고 마음으로 듣다 / 피귀자

 

 

비는 온전히 내게로만 온다. 땅과 하늘과 그 사이를 가득 메운 물방울들, 깊고도 높고 넓고도 좁다. 온 데와 가는 곳은 또 어디인가. 오래 망설이다가 비닐 우의에 의지한 채 쏟아지는 빗줄기에 몸을 맡겼다. 몇 방울만 맞아도 어깨가 묵지근하다. 세계가 그 안에 맺힌 듯 옹골차다. 희붐한 새벽 기운이 시린 마음을 감싸 안는다.

산사의 시계는 더디게 갔다. 천지가 개벽할 듯 밤새도록 바람은 비를 부르고 우박과 천둥 번개가 이어져 두려움의 강도는 높아져 갔다. 자연이 혼을 빼놓았다. 겨우 얻은 잠자리가 법당 안 구석 자리인지라 그래도 마음은 놓였으나 섬광 속에서 오래 뒤척였다. 난생 처음 누워보는 곳인 데다가 어둠 속 부처의 형상이 번쩍거리고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여러 줄로 누운 사람들의 기척까지, 촉각이 곤두섰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감탄사가 터져 나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햇빛을 잘게 부수며 유쾌한 소리로 흐르는 시냇물과 영혼까지 맑게 하는 경쾌한 폭포소리, 웅장하고 수려한 바위며 고목들이 신선하고 경이롭다. 이틀 전 봉정암에 다다랐을 때만 해도 날씨는 화창했고 비의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높낮이가 다른 지형을 이용하여 지어진 사찰 건물들이 주변 경관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봉정암. 7층 석탑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친 용화장성의 바위들이 빚어내는 웅장한 기세와 환상적인 풍광들이 간격을 허물고 내 안에 들어와 벅찬 감정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애국가가 연주되는 화면 속 바위들의 정경이 이곳의 모습이었다는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가슴 서늘한 비경이다. 내려오기가 싫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봉정암에서 오세암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끝을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전날의 풍광들과 비교가 되었다. 끝없이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메마른 산길에서 투들대며 지쳐갈 무렵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산 속의 날씨는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오세암 지붕 밑에 들어서자마자 굵은 구슬 같은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뒤쳐졌던 등산회 일행들이 머리가 깨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며 흠뻑 젖어 들어섰고, 궂은 날씨로 방향을 바꾼 사람들과 신도들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칠흑 같은 폭우 속을 기어서 도착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산사에 갇히고 말 것 같은 두려움에 서둘러 새벽에 하산 길에 오른 것이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숲을, 세상을 두드린다. 빗줄기에 흠씬 시달린 땅은 이제 더 이상 빗물을 껴안지 못하고 아우성이다. 여기저기 도랑을 만들어 콸콸 흘러내리고 패인 길은 발 놓을 데가 없다. 뿌리째 뽑힌 나무들은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덜 깨어난 나무들, 아니 잠들지도 못했을 숲 속, 온통 물바다다. 두려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풀잎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을 음악으로 여기니 축제의 장이 되었다. 장단에 맞추어 하염없이 걸으며 이제 귀로 보고 마음으로 듣는다. 자유롭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평화롭고 유장하게 흐르던 당이 하루 이틀 사이에 폭도로 변해 버렸다. 불과 이틀 전의 고적감을 삼켜버린 황톳물은 성난 파도가 되어 계곡을 할퀸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나보다. 굽이치는 물결의 성난 얼굴, 블랙홀에 빠진 느낌이다. 급류 노도의 물결 속에서 전차군단의 기동소리처럼 요란한 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큰물이 지면 바위가 운다더니 저 소리를 이름인가. 저절로 발길이 멎는다.

자연이 모서리의 완고함을 다스리는 소리, 모가 나면 자신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곁의 사람까지 다치게 하지 않던가. 쿵쿵 다그닥다그닥 물의 심장이 방망이 친다. 강은 성난 얼굴로 한 많은 시간을 씻고 있다. 집착을 버리면 상처도 줄어들고 모서리의 완고함은 사라지려니. 하늘과 땅, 낮과 밤, 더위와 추위를 산 속에서 맞으며 잡념은 사라지고 평화가 왔다. 숲 속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죽어 있지만 곧 살아날 것들, 살고 있지만 언젠가 죽어갈 것들이.

그 시간에 깨어있지 않으면 그 빛이 얼마나 찬란하지를 알지 못했으리. 울창한 숲을 자유로이 빠져 나가는 바람처럼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산문을 내려서는 순간 또 이 산이 그리워지리라. 서늘하고 경이로웠던 이 사간이 잊히지 않으리라. 그리고 내가 본 정경은 비현실로 사라지고 꿈처럼 아련해지리. 젖은 옷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제 쌉쌀하고 푸르다. 깃털을 말리려 높이 나는 새소리는 청아하다. 젖은 신발 속에서는 흙탕물 구르는 소리가 난다.

네 시간 넘게 빗속에서 자연에 흠뻑 젖으며 동화된 일행들의 뒷모습이 자연의 일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