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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뿌리에게 / 이미영

뿌리에게 / 이미영

 

 

이태 전에 새끼손가락만 한 풍란 하나를 샀다.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여린 초록 잎을 나풀거리며 "저요, 저요." 손짓하는 것 같아 덥석 집고 말았다. 베란다에 놓아두고 내키는 대로 물을 주었다. 좁은 잎사귀가 오그라들 지경까지 한 방울도 주지 않고 방치하기를 여러 날이었다. 이끼 사이로 드러난 허연 뿌리는 목이 마른지 충분한지 신호를 보내는데도 그 녀석의 상태를 살피기보다는 손이 닿는 대로 하였다. 그러구러 내게서 두 해를 버틴 풍란은 올봄 제법 반질거리는 몸체로 자라 있었다. 천성이 벼랑 끝에서 바람을 맞으며 산다더니 감옥같이 꽉 막힌 공간에서 어찌 견뎠는지 기특하다. 옛 성현들은 유배지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더니 이 녀석도 해남이나 흑산도 출신인가 보다.

사람들은 우람하게 치솟은 나무를 보고 하늘과 땅을 잇는 풍모라고 생각했는지 제사를 드리며 모시기도 했다. 아름드리가 드리운 그늘을 즐기고 비도 피해 가며 생색내지 않는 묵묵함에 감사했다. 나도 두 팔로 감당이 안 되는 둘레에 빽빽한 잎으로 옷을 삼은 나무를 볼 때면 탄성을 그치지 못했다. 하늘을 찌르는 높이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기도 했다. 지난여름 설악산 계곡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 한 그루와의 대면은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바위가 눈과 비를 견디지 못하고 갈라진 얇은 틈 사이로 돌 부스러기를 흙 삼아 덥고 깡마른 뿌리를 발톱처럼 세운 소나무는 경이로웠다. 언젠가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회에서 근육과 인대로만 뒤덮인 몸을 본 적이 있다. 한 꺼풀 피부 아래의 신비가 느껴지기보다는 기괴하게 다가왔다. 한동안 해골의 이미지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었다. 세월을 먹다 보니 그 인체상은 삶의 고통을 날것으로 받아들이는 형상 같아 오히려 담담하게 변해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면 등신불과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했다. 바위에 버티고 선 사철 푸른 바늘잎을 마주하며 근육만 노출된 인체상이 떠오른 건 무슨 일일까. 피부라는 보호막도 없이 허연 인대를 드러내고 섰던 한때 사람이었던 몸.

오롯한 소나무는 쩍쩍 갈라진 수피를 철갑처럼 두르고 갈고리 같은 뿌리를 암석에 내리고 버티었다. 힘줄같이 질긴 뿌리는 바위 옆구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잔털 하나까지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암석이 품은 물기를 빨아들이며 사는지 공기 중의 습기를 들이키며 사는지 메마른 기색에도 당찬 의지가 드러났다. 언뜻 보기에 키가 작고 바늘잎도 성글어 몇 해 되지 않은 생명인가 싶었다. 한 줌도 못 되는 흙에 의지해 살자면,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고 섰자면, 안으로 더 안으로 성장할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몸집은 키 작은 소년이지만 나이테는 켜켜이 성년일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낭떠러지 같은 경사로에서 버틸 힘을 준 것은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얼키설키한 뿌리였다. 돌은 잘못 밟으면 부서져 내려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지만 밖으로 드러난 그것은 언제나 든든했다. 급경사 부분에 묶어둔 밧줄도 나무 둥치 아랫부분이거나 주인이 누군지 모를 만큼 서로 엉긴 뿌리였다. 손잡이로 삼아 당기기도 하고 발판으로 딛고 오르기도 했다. 하산 길에서도 흙 밖으로 오래 노출되어 노인의 심줄처럼 도드라진 그것에 의지했다. 나무를 키워내야 게 소임을 다하는 것일 텐데 오가는 등산객을 지탱해 준다고 스스로를 생채기 내고 있으니 밟으면서도 미안했다. 뿌리를 보러 산으로 가는 이들이 있을까. 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나무는 잎, 줄기, 뿌리로 자신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한 나무로 살아가는 것일 게다. 단풍에 감탄하는 이들에게, 녹음에 파묻히는 사람들에게 나도 봐달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와서 즐기라고 내어주며 살았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워졌나 보다. 그래서 세월을 안은 자태에 더욱 감탄했나 보다.

안 보던 거울을 응시할 때가 많아졌다. 입 주위로 보이기 시작하는 주름에 자꾸 눈이 고정된다. 피부를 양 손가락으로 밀어 귀 쪽으로 당기며 이렇게 만들어 볼까 저렇게 바꾸어 볼까 거울에게 물어본다. 내가 내게 대답한다. 나는 타인에게 무엇으로 기억될까. 얼굴일까, 속사람일까. 참 희한한 일은 오랫동안 사귄 사람들일수록 생김새는 흐릿하게 가라앉고 내면은 또렷하게 부각되었다. 하는 수 없이 웃었다. 그러고 나서 또 웃었다. 입 근처 근육이 올라가도록 안으로부터 미소를 불러왔다.

우리 집 풍란은 어린데도 의젓하다. 주인이 물을 줄 때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다. 아파트 감옥살이에도 연연하지 않고 담담하다. 식물들도 자신을 공격하는 벌레를 인지한다는 연구 결과를 들었다. 다 알면서 눈 감고 자신을 키우며 살아가는 중이다. 몇 해 더 지나면 풍란은 꽃을 벙글게 하는 소임을 다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뿌리에게 고맙다고 하겠다.

나는 자주 거울을 보게 될 것 같다. 세월을 따라 물기를 잃어가는 내게는 뭐라 해야 할까. 웃음꽃이 환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시들지 않는 웃음꽃을 피운 뿌리에게 고맙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