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수쇠 / 정원정
한낮이다. 길가 목 좋은 모퉁이에 벌여놓은 보자기 가게(坐商)에 들렀다. 무 하나, 애호박 두 개를 사 들고 쉬엄쉬엄 오는 길에, 어찌나 걸음걸음이 팍팍하던지 길녘 벤치에 앉았다. 맞은편, 눈부시게 하얀 아파트 한끝에 머문 시월막사리 하늘은 푸른빛이 깊다 못해 왕연(旺然)한 반물빛이다.
지난겨울, 이사한 집의 묵은 때를 벗기느라 힘이 들었다. 그 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정형외과에 가 보았더니, 엑스선 사진을 살펴본 의사 설명인즉 걸어가다 쉬고 싶을 거라며 척추골 네 개가 협착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게, 어느 시인이 어머니 말투를 빌린 시구에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하듯 나도 그랬던가 보다. 척추는 저뭇한 세월에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끈끈한 묵은 정으로 몸 매무시를 지탱해 주었던 걸까.
나는 평소에는 척추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탈이 나고서야 비로소 한평생 직립으로 허릿심을 지탱해 준 척추의 됨됨이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귀한 살붙이임에도 마음 쓰지 못하다니, 내 아둔한 구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 발 건너선 이웃에게야 오죽 무심했겠는가 싶다.
척추한테서 두남받은 고마움에 생각이 머물다 보니,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주변에 척추의 역학적 구조와 닮은 사물들이 눈에 띄었다. 세상 만물은 저 혼자 독립해서 생의 무게를 지탱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에 수긍이 갔다.
우연찮게 맷수쇠를 알게 되었다. 맷돌 아래짝 한가운데 박힌 아주 작은 뾰쪽한 쇠를 맷수쇠라 하는데, 제 몸보다 엄청나게 큰 맷돌 몸통을 거리낌 없이 지탱해 주는 물건이다. 더욱 맷수쇠는 무생물임에도 사람 사는 품과 닮은 데가 있어 흥미롭다.
맷돌은 암 맷돌, 수 맷돌이 포개져 있다. 윗돌이 밑돌을 암팡스레 껴안고 숨차게 돌고 돌며, 알곡도 무거리도 가루로 잘게 부수고 으깬다. 밑돌과 윗돌은 한속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부드러운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암 맷돌에는 곡물을 넣는 ‘아가리’도 있고, ‘어처구니’란 맷손도 있다. 맷돌질할 때 그네들도 맷수쇠 못지않게 힘깨나 쓰는 일꾼들이다. 그 연모들도 서로 감싸주고 도우며 갈기, 부수기, 기피 내기를 하며 제구실을 다한다.
거기에는 밑돌 중심부에서 윗돌과 밑돌이 정확히 맞도록 역할을 하는 맷수쇠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맷수쇠는 비록 작은 부품 같아도 중심을 잡고 버티는 데는 시골집 앞마당에 긴 빨랫줄을 받쳐주는 키 큰 간짓대의 몸짓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아주 작은 몸으로 거대한 위 맷돌을 받치고 제자리를 지키는 맷수쇠는 그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성찰하는 사람 같다. 참으로 겉보기보다 내면이 깊다. 어려운 시대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 역시 생색내지 않고 제 서 있을 자리를 알고 행동하지 않던가. 사람도 돌덩이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한껏 살아가는 게 태반인데 각기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나의 설자리를 알고, 내 분수를 알면 거기에 따른 책임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노상 빗먹듯, 실수 덩어리를 몰고 다녔다. 여들없이 감정을 헤집어 뒤변덕스레 어디에고 차분히 마음 기대지 못하고, 거처마저도 어느 이국의 유랑민처럼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느라 더 혼란스러웠다. 새도 가지를 가려서 앉는다는데, 어디에고 안착을 못 하고 방황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고, 길이 사라져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럴 적엔 인생길이 꼭 그믐칠야처럼 느껴졌다. 황혼의 저물녘까지 잰걸음으로 걸어온 고빗길마다 참 서툴게 살아왔다.
그 사이 척추는 한눈팔 겨를 없이 제자리에서 한세상을 엄살 한번 피우지 않았다. 나는 그 속사정의 경계를 숫제 거니채지 못하고, 그저 불편한 다리 탓만 했다. 그는 뼈마디가 구부스름히 일긋했으련만 말없이 안으로 안으로만 삭혔을 터, 내 유년의 마을 들목에 서 있는 느티나무처럼 비바람이 후려치는 극한의 외로움을 홀로 견뎌냈으리라.
흔히 작고 미미한 것보다는 으리으리한 것에 눈이 간다. 숨겨진 곳에 깊고 아늑한 은혜가 스며있음에도 말이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건 자연과 사람에게서 두남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하고 혼탁한 세상일지라도 그래도 중심을 잡고 인간의 길을 고뇌하며 양심적으로 번민하는 영혼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나와 다른 삶과 존재 방식을 존중하고, 서로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함께하는 따스한 모습은 우리의 위안이고 희망이다. 꽃이 인간의 재주를 제치고 자연의 섭리로 개화의 시기를 알아 자기 몫몫을 펴 가듯 스스로 진정성을 안고 행동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정신적인 맷수쇠인 것이다.
『무신예찬』에서 작가 데일 맥고원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우주적으로 하찮은 존재다. 공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고 시간에서는 한 찰나에 불과한 헤아릴 길 없이 미미한 존재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만은 중요해질 수 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우리 서로에게만은 말이다.”
그렇다. 누구나 이 광대한 우주 속에 단 한 사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다. 그럼에도 혼자만이 아니다. 세상 만물이 나와 무관한 존재가 어디 있던가. 별 탈 없이 반복되는 일상도 알게 모르게 어디선가 도움의 손길이 있다. 내 존재 역시 누군가를 지탱해 주고 있다면, 살아 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인간 삶에서 너와 내가 서로 기대고 받쳐주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그 진실을 맷수쇠는 알고 있었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도 결코 불의를 보고 눈 감지 않았다. 고통을 감수하고 그 사회의 현안을 푸는 일에 함께할 책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풀 한 포기도 우주의 기운을 받아 존재할진대, 어느 한 생인들 존귀하지 않겠는가. 소풍 전야처럼 가슴 설레는 삶이어도 한 생은 짧다. 살아있음이 감동으로 이어져서 서로의 인연을 귀히 여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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