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두리 꽃 / 윤태근
그날따라 평소 다니지 않던 골목길에 왜 들어섰을까? 이런 것을 우연의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그렇게 만났지. 가을이 한창인 어느 날, 네가 저만치서 골목 바람과 함께 보랏빛 꽃송이들을 흔들어 대더라. 사람의 감각이란 참 묘한 면이 있나 봐. 초라한 회색 골목이 네 아우라로 눈부시게 환해지는 거야. 그 순간 환호성 같은 개선행진곡이 들려왔지. 맞아, 분명 베르디의 아이다였어. 뭐?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거나 환청이었을 거라고? 글쎄, 아무튼 충격이었다니까.
네 몸 어디에 그런 빛을 감추고 있었는지 몰라. 일곱 송이 청보라 화관이 마치 혼례복을 차려입은 새색시였다니까. 나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지. 꽃잎들을 원구처럼 모아 안은 것이 야구공만 하게 실하더군. 꽃송이 안으로는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 꽃잎들이 바깥쪽으로 갈수록 붉은색을 띠고 있는 거야. 불그레한 보라색 송이가 분명한데 좀 떨어져서 바라보면 청보라로 변하는 게 마냥 신기했어. 가까이서 보고 멀리 다시 확인하고…. 철없는 아이처럼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몰라.
한참 후 네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지. 차 한 대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골목길. 양쪽으론 낡은 주택 담장들이 이곳저곳 속살을 내보이며 늙어가고 있었어. 어디를 둘러보아도 흙 한 줌, 풀 한 포기가 없었지. 숨 막히는 회색 콘크리트만의 세상이었어. 그런데 도로와 경계석의 틈새 ― 엄지손가락 하나 드나들 만한 공간에 용케도 네가 서 있었던 거야. 추레한 담장을 배경으로 아주 태연하게 팔 벌리고 서서, '삶이란 이렇게 처절하고 위대한 것이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니까. 넋 놓고 있다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만 돌아서고 말았지.
“아유, 곱기도 하다. 초례청 새색시가 따로 없네.”
그 할머니였어. 지하 셋방에 살며 폐휴지를 줍는 할머니. 그래, 늘 흥얼거리며 골목을 오가던 분. 언제 보아도 절반도 못 채운 낡은 손수레가 강아지처럼 돌돌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잖아. 곱게 늙은 얼굴, 어린애 같은 미소, 나지막한 흥얼거림.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행복하게만 보이는 할머니였지. 한참이나 네 모습을 살피던 할머니가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멀어지더라.
몇 년 전부턴가. 우리 집 폐품을 모아 드리던 인연으로 할머니 신상을 대강은 알아.
청상과부로 하나뿐인 아들을 기르며 안 해본 일 없었단다. 악착같이 돈을 모을 수밖에. 친정이나 시댁 어디에고 기댈 곳 없는 처지였거든. 시장 점포에서 포목상으로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지. 이러구러 장성한 아들이 사업을 시작하자 결혼을 시켜 살림까지 내줬지. 손자들도 생기고 아들 사업도 순탄하고, 이제 살 만하다 싶었더란다. 늘그막엔 시내 변두리에다 삼층 상가를 마련했단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겨울이었어. 다 죽어가는 얼굴로 찾아온 아들이 통곡하더란다. 사업을 실패하고 부도 맞은 것이지. 상가는 물론 점포까지 처분해 간신히 빚 가림은 했으나 그 뒤론 하는 일마다 꼬이더라나. 어찌어찌하다 보니 아들네는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로 이민했고 할머니는 우리 동네에 살게 되었더란 거야.
그런데 말이야, 정말 궁금한 것이 있어. 한땐 자살까지 생각했다던 할머니가 어떤 일을 계기로 세상이 행복해 보이더란다. 그것이 무슨 일이었었냐고 캐물어도 손사래 치며 그냥 웃기만 하는 거야. 다음에 만나면 꼭 다시 여쭤봐야지.
첫눈이 흩날리는 겨울 아침, 할머니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왠지 골목을 찾아야 할 것 같아 나섰습니다. 족두리 꽃은 듬성듬성 남루한 꽃잎을 매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온몸이 새파랗게 질린 채 길고 가느다란 씨앗 주머니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보아도 씨앗 한 톨 맺지 못한 빈 주머니였습니다.
문득 행복한 미소와 함께 멀어져 가던 할머니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종이박스 두어 개 실은 손수레만 탈탈 뒤따르는데, 본래의 색을 잃어 보랏빛으로 변한 할머니의 낡은 모자가 남실남실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