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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다듬이 방망이 / 윤태근

다듬이 방망이 / 윤태근

 

 

엄마의 다듬이질은 저녁상을 물리고 한참 지나 졸음이 찾아올 때쯤 시작한다. 풀 먹인 당목 이불호청이 너무 말라 뻣뻣하다고 놋대접에 맑은 물을 준비한다. 할머니와 맞잡고 팽팽히 당기다가 입으로 푸우~ 안개같이 뿜어낸다. 주름을 대강 편 후 개켜 밟다듬이를 시작한다.

심심하다. 눈을 비비며 떼를 써 본다.

“으응, 재밌는 옛날 얘기이~”

“이야기 너무 바치면 가난뱅이 된다. 어서 자거라.”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이웃 마을 돌이 아버지가 밤늦도록 술 마시고 집으로 오다가, 동구 밖에서 도깨비 만나 새벽까지 씨름하고 넋이 빠졌다는 이야기. 뒷간 몽당귀신 이야기. 서낭당 앞 모퉁이에 산다는 처녀귀신, 달걀귀신 이야기. 늙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어린 신랑을 구하려고 호랑이 꼬리를 잡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산속을 헤매는 새색시 이야기…. 하도 들어서 뻔한 이야기인데 왜 늘 무서운지 모르겠다. 외양간에서 워낭소리가 들려온다. 누렁이도 할머니 이야기가 무서워 잠을 못 자나 보다. 머리 위까지 이불을 덮었으나 잠은 저만치 달아난다.

가을밤 다듬이질 소리는 호롱불 남실거리는 방안에서부터 퍼져 나간다. 안마당 건너편 외양간 이엉지붕을 넘고 텃밭을 지나 앞산 봉우리 위 먼 달빛 하늘로 사라진다. '왜 엄마는 다듬이질을 또 하는 거지? 온종일 밭일을 그렇게 하고서도.’무서움을 애써 떨쳐버리며 따뜻한 이불 속을 파고든다. 토드락토드락 아슴푸레 멀어지는 방망이 소리에 이끌려 까무룩 잠이 드는데 옆집 숙이 얼굴이 떠오른다. 이야기 속 새색시같이 씩씩한 숙에게 장가가면 얼마나 좋을까…. 누렁이도 잠들었나 보다. 워낭소리 대신 푸우〜 깊은 숨소리만 들려온다.

꿈을 꾼다. 엄마가 애써 다듬이질한 이불호청을 타고 높이 하늘을 난다. 눈부신 빛을 뿌리는 달님을 만난다. 함께 구름 사이를 달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달걀귀신에 놀라 떨어지고 만다. 도깨비가 방망이를 던져주며 칼싸움하자고 덤빈다. 아무리 해도 구척장신 도깨비를 이길 수 없어 땀을 흠뻑 흘리고 만다. 돌이 아버지같이 넋을 잃지 않으리라 용을 쓰다가 깨어난다. 다행히도 엄마의 다듬이질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다음날 아침. 온 천지에 내려앉은 무서리가 말갛게 투명하다. 엄마가 다듬질한 옥양목보다 더 푸르고 하얗다.

다듬잇감은 이불, 요, 베개의 호청이나 옷감으로 쓰인 당목, 옥양목, 무명이 대부분이다. 가끔 광목에 자수를 놓은 횃댓보도 있다. 다듬잇방망이는 도깨비방망이 같다. 엄마가 가르쳐 주었다. 주름살 많고 거친 다듬잇감일수록 방망이로 다듬어야 주름살이 펴지고 반듯하게 되는 것이란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땅따먹기 놀이에 빠져 숙제를 못한 날이다. 호랑이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옆집 동무를 꾄다. 학교 대신 숲에 가서 새끼 새를 꺼내며 놀자고. 둥지 속 새알을 뒤지다가 버찌, 산딸기, 오디를 실컷 따먹는다. 억센 풀에 베이거나 풀쐐기에 쏘여도 좋기만 하다. 손과 입가에 물든 보라색을 보고서 서로가 웃는다. 가재도 잡고 송사리도 잡고, 도랑 막기 물싸움을 한다. 흠뻑 젖은 바지를 벗어 양지 바위에 널고 풀밭에 눕는다.

학교도 숙제도 다 잊는다. 여치가 운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간다. 엄마가 널어놓은 냇가 이불호청과 같이 눈부시다. 먼 곳 뻐꾸기와 산비둘기 소리가 아련하다. 그 사이사이로 엄마의 빨래 방망이와 다듬잇방망이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다. 스르르 졸음에 빠지려는 순간 가까운 풀숲에서 푸드득 장끼가 날아오른다. 잠은 저만치 깜짝 달아난다.

하교 시간을 겨냥하여 몰래 집으로 간다. 시침을 뚝 떼었으나 어떻게 알았을까. 아버지께 회초리로 흠씬 맞는다. 이런 아픔은 처음이다. 부아가 나 저녁밥도 안 먹고 흐느끼다 잠이 들었나 보다.

“얘야, 밥은 먹고 자야지. 어서 일어나거라.”

엄마가 어깨를 흔든다. 깊이 잠든 척한다. 벌떡 일어나 엄마를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는다. 아까 아버지를 말리지 않아 화가 난 것이다. 가만가만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며 엄마는 한숨 섞어 혼잣소리를 한다.

“얼마나 아팠을꼬. 어린 것이. 그래도 할 수 없다. 잘못된 것은 일찌감치 고쳐야지. 아파해도 바르게 잡아야지. 다듬잇감도 밟고 두드려야 하는 법이잖아. 어이구 우리 이쁜 강아지.”

엄마는 내 궁둥이를 두어 번 두드리고 이불을 덮어준다. 톡 톡 톡 토닥토닥 다듬이질 소리를 들으며 설핏 잠이 든다. 그런데 웬일일까. 내가 다듬잇감이 된 것이다. 엄마대신 도깨비가 방망이질한다. 나를 마구 내리치더니 어느새 아버지 얼굴을 하고 있다. 으악 소리 지르며 일어나고 만다.

“몹쓸 꿈을 꿨구나, 이젠 괜찮다 괜찮아.”

얼싸안은 엄마의 품에서 무섭고 서러워 울음을 터뜨린다. 다독이는 엄마 손길에 더 오래도록 울고 싶은데, 열린 문틈으로 갸웃이 엿보는 달님이 부끄럽다. 흐느낌 속에 혼자 다짐한다. 도깨비한테 또 혼나기 전에 다시는 나쁜 짓 않겠다고⋯.

이미 자정을 넘긴지 오래다. 베란다에 나가 블라인더를 올린다. 야행성 동물 같은 서울의 밤이 이빨을 번뜩이며 유리창으로 덤벼든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밤하늘의 기억은 아득하기만 한데, 그 많던 별은 어디로 간 것일까. 도시의 밤하늘에 밀려났는지 서너 개만 껌벅이고 있다. 때마침 떠 있는 보름달마저 그 윤곽이 희미하다.

잘못을 나무라는 부모를 죽인 패륜아 뉴스가 자꾸 맴돈다. 오늘 밤에도 수면제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