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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스커트 / 서숙

스커트 / 서숙

 

 

봄날, 런던은 어느 공원이나 푸른 잔디밭 위에 옹기종기 낮게 핀 꽃들로 가득하다. 일 년 내내 햇빛이 강렬하지 않아서 연한 파스텔톤의 색조가 밝고 맑다. 꽃들을 닮아 머리색이 연한 할머니들이 그 사이를 하느작 누비는 모습은 평화롭다. 통통하거나 말랐거나 키가 크거나 작거나 모두들 한결같이 꽃무늬가 가득한 스커트 자락을 하늘거리며 느릿느릿 산책한다. 살랑거리는 꽃들에게 보내는 잔주름 가득한 미소를 마주치는 이방인에게도 은은하고 나눠주곤 한다.

꽃들 못지않게 노인들의 스커트가 인상적이다. 저토록 다양한 꽃무늬의 패턴이 가능한 이유를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들이 설명해 준다. 옷뿐만 아니라 예쁜 정원이 딸린 집집마다 벽지와 소파와 커튼에 사랑스런 화훼 문양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유독 스커트에 나의 눈길이 머무는 것은 꽃무늬의 다채로움과 더불어 그 만들어지는 부드러운 주름들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주름의 빛과 음영을 미술관의 작품들에게 마음껏 즐길 수 있다시피 서양 미술사는 옷 주름에 빚졌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는 그토록 풍성한 주름의 향연으로 조각가들과 도예가들과 화가들은 그들의 기량을 맘껏 뽐낼 수 있었다. 들뢰즈는 그 시대를 해석하여​ '바로크의 두 층, 즉 자연과 정신, 신체와 영혼을 가득 채워야 할 것은 보다 많은 주름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접기, 펼치기, 다시 접기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옷의 주름이나 얼굴의 주름은 모두 나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시간의 축적이다. 그러한 겹침과 펼침을 반추하며 우리는 삶을 응시한다.

같은 옷이라도 입는 사람에 따라 옷에는 그 사람만의 주름이 생긴다.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각양각색의 주름은 만남과 기로의 와중에 개정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은 닮은 듯 모두 다르다. 옷 주름처럼 얼굴의 주름도 나의 내력을 간직하는 것이니 애써 주름을 지우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자신의 주름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삶을 완전 연소시키지 못한 유감과 미련 때문일 것이다.

문자(文字)에서 ‘문(文)' 의 의미는 원래‘무늬, 채색'으로 ‘문(紋;무늬, 주름)'의 맥락이다. 글월은 결국 삶의 채색 무늬이며 그림자라는 각성이 새롭다. 또한 '엮고 짜내다'라는 뜻의 라틴어 텍스투스(textus)를 어원으로 하여 텍스타일(textile;옷감)과 텍스쳐(texture;본바탕)와 텍스트(text;본문) 등이 파생되었다. 동서양이 공히 인문학의 근원을 비단 천에 새겨진 문양으로부터 찾은 것이 신기하다. 그러니까 텍스트는 패턴이며 문화(文化)는 문화(紋化)다. 의생활은 이렇게 인류 문명사의 핵심을 이룬다. 옷을 입어 자신만의 고유한 무늬를 걸치고 주름을 만드는 것은 삶 그 자체 속에 무늬의 규칙성과 주름의 우연성을 엮어 자신만의 문화를 생성시키는 과정의 연결부호를 이룬다. 나아가 문학은 그러한 무늬와 주름을 천착하자는 것이다.

이쯤에서 스커트의 넉넉함을 생각해 본다. 능률과 실용이 대세인 현대인의 삶에서 바지에 비해 몸과의 밀착도가 낮은 스커트는 거추장스럽다고 한다. 그러나 타이트한 미니스커트가 아니라면 품이 넓은 원피스나 치마 속에서 몸은 제약을 덜 받아 자유롭고 편하며 바람도 잘 통한다. 가뿐한 차림새라고 반드시 몸매를 다 드러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개더나 샤링 등으로 바지보다 여분의 천이 좀 더 필요한 만큼의 여유라고나 할까. ​

항용 스케일이 크고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을 가리켜 '치마만 둘렀지….'​라고 하며 바지와 남성성을 동의어로 여긴다. '바지 입은 여자‘바지 입은 여자(She wears the pants.)는 남자를 깔아뭉개는 여자라고 부정적으로 쓰이듯이 한때 바지는 남자만의 특권을 상징하기도 했다. 2013년 2월 4일자로 프랑스 여성들이 무려 213년 만에 비로소 '합법적으로'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어이가 없다. 1800년에 파리에서는 법령을 선포하여 여성은 바지를 착용할 수 없도록 했다는데 이 사문화된 법은 어찌된 일인지 이제야 정식으로 폐지된 것이다.

이렇듯 바지를 독점해 왔던 남자들은 양 다리를 구분 지어 갈라놓은 한계 때문이었을까, 편협하고 분쟁만을 일삼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류의 갈등과 반목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은 대다수가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는 이유는 전적으로 남자들 탓이다. 도대체 유사 이래 권력을 쥐고 이만큼의 성과밖에는 이룰 수가 없었더란 말인지.

그들은 여자들이 바지를 입지 못하도록 선을 긋더니 가엾게도 이제 와서는, 아무도 입지 못하게 막진 않건만, 오히려 치마를 입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여자는 바지건 치마건 마음대로 골라 입는데 남자가​ 원피스를 걸친 모습은 곧잘 희화화戱畵化의 대상이다.

스커트(skirt)에 '회피한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림의 미학이랄까, 때로 연약한 듯 두루뭉수리 에둘러 껴안는 형상을 떠올린다. 매사를 드러내고 분명하게 정의 내리고 재단하는 것만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슬쩍 비켜서고 뒷걸음쳐서 딴청을 피우며 한 숨 돌리다 보면 절로 길이 트이는 경우도 있다. 멀리 보고 전체를 보고 다각도로 보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커트는 포용성의 상징이다. 이제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대장정은 잘못 많은 남자들 대신에 치마 입은 여자들의 몫이다. 괴테는 일찍이 '영원히 여성스러운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하였으니 지극한 여성스러움의 상징은 폭이 넓고 주름이 많이 잡힌 스커트다.

바람이 분다. 세파에 긴 치마가 펄렁인다. 휘도는 옷자락이 다리를 휘감으며 둥글게 부풀면 우아한 자태는 아량과 여유, 풍성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열두 폭 치맛자락을 더욱 크게 펄럭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