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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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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갚을 수 없는 빚 / 김영관 갚을 수 없는 빚 / 김영관 열네 살 때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을 못한 나는 아침 일찍 난전에 장사 가신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을 때였다. 머릿속에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아 힘겹게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의아했다. 간호사가 이마를 짚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어제 적산가옥 삼 층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에 머리를 맞아 아스팔트길에 쓰러져 있는 나를 지나던 군인이 업고 병원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막내가 낮잠을 길게 자고 있었다. 갑자기 적산가옥 일 층에 있는 만화방 가게 유리문에 붙은 만화 그림이 보고 싶었다. 그 적산가옥은 삼 층으로 다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
[좋은수필]하회에 젖다 / 김만년 하회에 젖다 / 김만년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오색 천이 만공滿空에 나부낀다. 덩더쿵~, 가을마당에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태평소와 뿔피리 소리에 아이들도 삐삐 풍선을 불며 추임새를 넣는다. 어느새 맘판이 오른 듯 탈춤 행렬이 꽹과리를 치며 마당을 돈다. 구경꾼들도 신명이 났는지 엉덩이를 실룩거리고 꼽추춤을 추며 익살을 부린다. 선비탈은 학춤으로 어적거리고 백정탈은 몽두리춤으로 너스레를 떤다. 부네가 엉덩이를 흔들며 양반탈을 희롱한다. 양반탈이 갈기 눈썹을 치뜨자 초랭이가 해득거리며 비나리를 친다. 추상같은 법도는 있되 삶의 격은 없는 듯하다. 스스럼없는 인정들이 이웃집 토담과 봉당으로 흘러넘친다. 누대를 이어 온 안동 사람들의 호방한 삶의 가락이 이곳 하회에선 지금도 징 소리 쟁쟁한 현재진행형으로 생동..
[좋은수필]몸무게와 마음무게 / 곽흥렬 몸무게와 마음무게 / 곽흥렬 몸무게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괜스레 주눅이 든다. 야위었다는 게 분명 잘못은 아닐진대, 꼭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그만 기가 꺾이고 만다. 이따금 날씬해서 좋겠다는 소리를 건네 오는 이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듣기 좋으라고 위로를 하려 드는 것 같이 생각이 되어 기분을 완전히 돌려놓지는 못한다. 신체에 대한 강박관념이 나를 몸무게 절대 신봉자로 만들었다. 체구가 듬직한 이들은 생선 병에 걸리지도, 그리고 평생 죽지도 않을 것처럼 여겨져서 은근히 부럽기까지 하다. 질병이 몰래 접근해 오다가도 그 우람한 몸집에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어쩌다 집채만 한 바위라도 들어 올릴 수 있을 것같이 건장하던 사람이 한창 살 나이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
[좋은수필]여백 / 최은묵 여백 / 최은묵 키 큰 나무에 집을 짓고 사는 새가 고음으로 운다. 고음은 공간을 먼저 점령한다. 공간 어딘가에 커다란 입이 있어 소리를 먹어치운다. 공중이 땅과 달리 소란스럽지 않은 이유다. 때로는 땅에서 자라는 고음이 있다. 낯선 높이에 적응하지 못한 소리는 길길이 날뛰는데, 마치 맹수가 발톱을 휘젓듯 허공을 찢는 느낌이다. 역전시장 생선가게에서 들린 여자의 큰소리도 바닥을 모르고 살아온 고음이었다. "할머니, 거스름돈을 이렇게 늦게 줘서 어떻게 장사하려고 그래요?" 고무장갑을 벗고 앞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쓴 후에야 천 원짜리를 새는 할머니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소란이 일자 옆집 상인은 딱하다는 듯 할머니를 흘깃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거들지는 못하고 뒤에서 젊은 여자를 욕했다. 주변..
[좋은수필]사진, 또 하나의 언어 / 김근혜 사진, 또 하나의 언어 / 김근혜 징후다. 답답해서 밥이 목구멍에 걸린다. 산맥들이 꿈틀거리며 탈출을 꿈꾼다. 좋지 않은 호흡기 탓에 서랍 안에서 꿈이 늙을 때가 많다.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 겨울을 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견디는 재간은 나이인 것 같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무작정 시동을 건다. 이사 온 지 삼 개월이 지나가는데 낯설다. 감기로 인해 실내에서 지내다 보니 가을이 떠나고 없다. 직장을 그만둔 후론 사진을 찍는다. 영혼이 피사체에 빠져 일체가 될 때 느끼는 희열이 나를 바깥으로 밀친다. 누군가가 지나쳐버린 하루를 담고, 내가 사랑하는 파도도 넣으며 위안을 얻는다. 검은 상자 안에서 빨간 알약, 파란 펭귄, 다 닳은 지팡이가 나온다. 그들의 호흡이 멈추기 전에 재빨리 하드웨어에 저..
[좋은수필]아버지와 아들 / 김영관 아버지와 아들 / 김영관 순천의 처제 집에서 김장도 할 겸 며칠 쉬다 오기로 했다. 김장을 끝낸 저녁, 처제 집 인근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운동을 나갔다 초승달 달빛이 흐릿한 학교 운동장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와 함께 ‘탁-탁’ 땅바닥을 치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따라잡으려 육상 트랙을 빨리 걸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두 남자였다. 두 사람을 지나치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가 든 남자가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젊은이를 반 강제로 끌다시피 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었다. 학교 담을 넘어온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연신 신음 소리를 내는 남자는 이십 대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나이 든 분은 얼굴에 땀범벅이 된 젊은이를 다그쳤다. “이제 한 바퀴 남았어!” 저 나이면 이제 아들의 어깨 ..
[좋은수필]위에서 내려다 보면 / 김국자 위에서 내려다 보면 / 김국자 햇볕이 좋아 뜰로 나가 앉아 보았다. 개미들이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을 찾는 모양으로 줄을 맞추어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풀섶 위로는 제 몸보다 큰 먹이를 끌고 가느라 애를 쓰는 놈도 있고, 한 덩이를 두 마리가 합심하여 끄는 놈들도 있었다. 어떤 놈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을 물고 가다 놓치고 찾느라 애를 썼다. 얼른 잡아다가 개미 앞에 놓아 주고 싶지만, 그쪽으로 보면 또 다른 살 권리가 있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세상에는 개미만큼 수도 많고 부지런한 생물도 없는 것 같다. 가만히 있는 개미는 못 보았다. 언제 보아도 움직이고 있다. 개미는 우리에게 근면과 질서의 미덕을 보여 준다. 물끄러미 개미들이 하는 짓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좋은수필]빨간색 양산 / 김희정 빨간색 양산 / 김희정 "나는 가끔, 내 몸에서 올라오는 아직 식지 않고 김이 서린 여자 냄새를 맡아." 그 냄새는, 언젠가 내가 뒹굴던 너른 침대의 바닥을 뚫고 배어 나오던 나무 냄새도 아니다. 더웠던 여름날 등줄기에 엉기던 땀 냄새도 아니다. 발바닥까지 보디로션을 바른 위에 향수를 덧뿌리고 외출하던 날 나던 푸른 바다 비린내도 아니다. 열심히 화장한 얼굴 모공에 든 파우더 향내도, 귀밑 그늘에서 풍기던 샤넬 NO.5의 잔향도 아니다. 욕망의 냄새라기보다는 긴급한 순간에 놓치기 싫은 밧줄처럼 뭔가 힘이 엄청나게 들어가 있는, 꽉 움켜쥐고 절대로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그냥 처절한 냄새다. 어쩌면 훨씬 더 젊은 날에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었던 농익은, 익어 터진 석류 알맹이를 베낀 알알이 검붉어진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