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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맷수쇠 / 정원정 맷수쇠 / 정원정   한낮이다. 길가 목 좋은 모퉁이에 벌여놓은 보자기 가게(坐商)에 들렀다. 무 하나, 애호박 두 개를 사 들고 쉬엄쉬엄 오는 길에, 어찌나 걸음걸음이 팍팍하던지 길녘 벤치에 앉았다. 맞은편, 눈부시게 하얀 아파트 한끝에 머문 시월막사리 하늘은 푸른빛이 깊다 못해 왕연(旺然)한 반물빛이다.지난겨울, 이사한 집의 묵은 때를 벗기느라 힘이 들었다. 그 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정형외과에 가 보았더니, 엑스선 사진을 살펴본 의사 설명인즉 걸어가다 쉬고 싶을 거라며 척추골 네 개가 협착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게, 어느 시인이 어머니 말투를 빌린 시구에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하듯 나도 그랬던가 보다. 척추는 저뭇한 세월에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끈끈한 묵은 정으..
[좋은수필]몸 언어 / 강병기 몸 언어 / 강병기  요즘 지하철의 패륜 이야기가 인터넷상에 많이 돌아다닌다. 막말과 폭행이 주류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정을 모르는 나로서는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지만 속상할 때가 많다. 노약자를 보호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 우리들 세대라면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싶다. 어른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고, 자리를 양보해야 하고, 공손하게 대답해야 하고, 눈을 마주쳐서도 안 되고… 안 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상식과 도리로 알고 자란 세대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 같다. 그 시절에도 속상한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날 밤 밤잠을 설치면서 시험공부를 한 탓에 버스에 앉아서 졸린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자는 척한다는 핀잔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
[좋은수필]등명여모燈明如母 / 이정화 등명여모燈明如母 / 이정화   등대는 구도자를 닮았다. 백 년을 하루같이 오롯이 지켜 서서 보시의 불을 밝힌다. 희뿌연 해무 속에서 어른거리는 불빛만이 들고나는 배들에게 생명의 길을 인도한다. 등대에게는 구도의 길이 숙명과도 같았다. 바다는 팽팽한 부력으로 배를 밀어 올린다. 바람이 일으킨 파도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길고 짧은 용틀임을 한다. 얼마나 많은 배들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그 바다 아래로 침잠해 들었을까. 한없이 가볍고 부드러운 물이라지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수록 무거운 벽이 되어 버린다. 거친 세상처럼 짓눌려 온다. 모든 것을 삼킨다 해도 티 하나 나지 않을 바다이다. 그 거친 바다를 내다보며 가랑잎 같은 배들을 불러 모아 품어 주는 등대는 바다와 맞서지 않았다. 희미해져 가는 미래..
[좋은수필]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 법정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 법정  이 가을 들어, 처음 절에 들어와 배우고 익힌 글들을 다시 들추고 있다. 그때는 깊은 뜻도 모르고 건성으로 외우면서 관념적인 이해에 그쳤었는데, 외떨어져 살면서 옛글을 다시 챙겨 보니 크게 공감하게 된다. 글이나 사상은 그 저자의 정신연령에 이르러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활환경이 비슷해야 더욱 공감할 수 있다.야운野雲스님의 '스스로 경책하는 글​ [自警文]'에 이런 시가 있다. 나물 뿌리와 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송락과 풀옷으로 이 몸을 가리며 들에 사는 학과 뜬구름으로 벗을 삼아 깊은 산 골짜기에서 남은 세월 보내리.몸과 마음 선정에 들어 흔들리지 않고 오두막에 묵묵히 앉아 왕래를 끊는다. 적적하고 고요해서 아무 일 없으니 이 마음 부처님..
용학도서관 수필 강좌 안내 대구 용학도서관​「흔적, 수필로 그리다」 수강생 모집강좌시간 : 매주 목요일 10:00~12:00강좌 기간 : 10월~12월방문 접수 ; 9월25일 09시~10월 10일 10시수수료 : 1만 원(도서관), 교재비 1만 원(강의실)개강 ; 2024년 10월 10일(목요일 오전 10시)월요일은 도서관 휴관, 접수 불가강좌 내용 : 자서전 쓰기에서 수필의 문학적 장치까지 (총 12강)접수방법 : 용학도서관 홈페이지-독서문화행사-정규강좌-온라인 수강신청-신쳥접수/문의 : 대구용학도서관 1층 데스크 방문접수(053-668-1721)강좌실 : 용학도서관 창의 체험실 (4층)오시는 길 ; 대구 전철 3호선 종점(용지역)에서 5분시내 버스 ; 다수
[좋은수필]향내 품은 툇마루 / 김순경 향내 품은 툇마루 / 김순경   좁고 가파른 길이 산속을 파고든다. 어둠이 사라지자 치열하고 분주했던 숲속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하기만 하다. 촌부의 손등처럼 거친 껍질의 소나무들도 깊은 잠에 빠진 듯 서로 엉켜 있다. 산허리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구불구불한 계곡길이 묵혀두었던 숲의 사연들을 토해낸다.마지막 능선을 넘어서자 멀리 기와지붕 용마루가 나타난다.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양지바른 곳이라 온종일 햇살이 머무는 아늑한 지형이다. 큰 절이 있었던 넓은 빈터에는 기와집 몇 채만 흩어져 있고, 작은 연지에는 누렇게 말라버린 연꽃 줄기들이 화려했던 지난여름을 말하는 듯 얼음을 뚫고 솟아있다. 개목사開目寺를 제대로 찾아왔다.원래는 흥국사였다.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의상대사가 신통한 묘술로 ..
[좋은수필]마키코 언니 / 김영주 마키코 언니 / 김영주   마른 잎 하나가 김이 피어오르는 허공에서 팔랑거리다 노천탕 수면에 내려앉는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둘러쓴 마키코 언니가 물살을 밀어내며 엄마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간다. 영락없는 모녀 사이다. 언니의 낯빛이 어린아이처럼 해맑다.“옛날에 저하고 목욕탕에 갔던 거 혹시 기억하세요?” 언니가 엄마의 어깨에 물을 한웅큼 정겹게 끼얹는다. “그런 일이 다 있었어?” 엄마의 희미한 기억이 잔잔한 미소로 번진다.마키코 언니가 초청한 4박 5일 삿포로 여행이었다. 언니는 친정아버지까지 꼭 모시고 와야 한다고 내게 몇 번이나 당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외국여행을 감당하기에는 아버지의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다. 언니는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마키코 언니는 가는 곳마다 엄마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친모..
[좋은수필]청에 젖다 / 안희옥 청에 젖다 / 안희옥  소리를 따라 새떼가 날아오른다. 천변의 갈대들은 중모리로 춤을 추고 만추의 은행잎이 꽃비처럼 흩날린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소리가 강물처럼 유장하다.강이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대금 연주가 한창이다. 가랑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소리에 취해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로 여남은 평 되는 마루가 빼곡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절한 소리에 듣는 이들의 가슴도 함께 저릿해진다. 무(無)의 공간을 꽉 채운 팔색조 같은 소리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대금에는 바람을 불어넣는 취구와 음정을 나타내는 여섯 개의 지공이 있다. 취구와 첫 번째 지공 사이에 난 구멍을 청공이라 한다. 이곳에 떨림판 역할을 하는 청을 붙이는데, 갈대 속의 얇은 막을 뽑아내어 만든다. 청은 대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