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 최원현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 최원현
하늘과 바다가 반가운 포옹을 하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그 품안에서 빠져 나온 푸른 숲, 그리고 하얀 옷에 오렌지색 모자를 쓴 건물들이 쪽빛 바다에 내리다 반사되는 햇살을 받아 여유롭게 빛나고 있었다. 빛과 색이 수줍은 듯 어우러지며 이뤄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였다.
내게 통영은 이상스러우리 만큼 그리움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통제영(統制營)이라는 크고 엄숙한 느낌보다도 바다와 섬 그리고 섬만한 산과 항구가 마치 모태 속 여덟 달 아기의 방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대게의 어항이 주는 음습하고 우울한 분위가 아니라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렴 고결한 선비 같은 품위를 자아내는 도시, 그래서 예로부터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미항으로 불려 왔나 보다.
통영에 올 때마다 남망산엘 올라 보고 싶었다. 중턱에 서 있다는 청마의 시비도 보고 싶고, 저 한산대첩의 현장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을 충무공상 앞에서 나도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삶에도 어떤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 같았다.
역사는 말이 없다지만 아니었다. 통영에 오면 무수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수많은 말들이었다. 그래서 아련한 그리움이 피안의 모랫벌처럼 밀려들게도 하고,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보면 이 땅에서 살다 간 이들의 애환이 몽실몽실 솜구름처럼 피어 오르기도 했다.
미명의 아침이었다. 바다의 일출을 보고자 했는데 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아니 섬 뒤로 부그러운 듯 사알짝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이내 둥실 몸을 드러낸다. 순식간에 누리의 바다가 온통 황금빛이 되어 버린다. 통영의 일출은 망망한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장엄하지 않으면서도 긴 여운의 감동을 오래도록 가슴에 남게 하는 그런 해 떠오름이었다.
남망산(南望山)에 올랐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바다와 섬과 도시에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꼭 어울리는 키와 덩치로 자리한 산, 얼핏 고래의 등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산은 살아 있었다. 수필 작가인 이곳 K 시장의 사랑과 꿈과 열정이 도시의 곳곳에서 tf아 피어 오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숨결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이곳 남망산인 것 같다. 시민회관이 그렇고, 작은 오솔길 하나에서도 정성스런 마음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남망산 조각공원은 국내작가 5명에 외국작가 1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랑블루(Grand Blue)라는 통영의 자연환경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는 작품의 내용과 크기와 재료를 결정하는 심포지엄 형식을 통해 이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 꿈꾸는 듯한 쪽빛 바다와 군데군데 떠 있는 섬들의 어울림은 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흥겨움, 그리고 명상적 태도의 통일된 공감대로 승화시켜 내고자 함이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브론즈와 스테인리스 스틸을 소재로 한 ‘허공의 중심’ 이란 제목의 우리 나라 작가 작품이었다. 나신(裸身)의 남성상을 다섯 단계로 설치하였는데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등 이원론적 사고(思考 )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대립과 분열을 극복해 내고자 하는 인간의 고귀한 염원을 나타낸 인체조각이었다. 강한 이미지의 나신 남성상(男性像) 에서는 태초의 에덴과 같은 원초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생명력은 생겨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았으며, 특히 삶에서 죽음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인간이 신 앞에서 생명에 대해선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인정케 하고 있었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프랑스 작가의 나무와 고무와 모터를 소재로 한 ‘잃어버린 조화’ 라는 작품이었다. 움직인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단순한 반복 동작은 주제도 없는 수동적이고 무의미한 움직임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곧 인간의 삶은 이런 무의미한 반복 동작일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한 것으로 모터의 동력에 의해 연결된 여러 토막의 통나무가 움직임으로 인간 행위와 삶의 의미를 곰곰 새겨 보게 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분재, 시간과 공간을 체험케 하는 입방체의 공간, 인체라는 소우주를 통해 초자연적인 우주의 원리와 생명력 및 연원의 활력을 표상하고 있는 ‘출산’, 음(-)과 양(+)의 균형 속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을 통해 명상할 수 있게 하는 ‘망산’ 등은 삶과 죽음이란 대주제를 자연적 지리적 환경을 통해 가슴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크게는 남망산 전체가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 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의 초점은 역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자리였다. 가만히 보면 통영은 우리 나라 모형의 축소판이다. 수군통제사가 수군을 통제 훈련하던 것처럼 삼면의 바다가 통영으로 모이고 통영에서 다시 나래를 편 물결은 태평양을 향해 더 힘차게 퍼져 나가듯 통영은 세계로 세계로 한국을 빛내 갈 힘의 발원지였다.
그래서일까. 통영이 낳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 박경리는 그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시작에서 자신의 고향 통영을 이렇게 그려 놓았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 청마(靑馬)의 시비 앞에 섰다. 그의 시 「깃발」이 바다를 등에 업고 새겨져 있다. 통영에는 청마가 살면서 거닐었던 거리와 그리움의 편지를 쓰고 보내던 우체국이며, 호심커피숍 등 추억이 깃든 곳들이 많다. 물론 지금엔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지만 그 자리엔 가지 못하더라도 통영에 오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결,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시비 앞에 서니 더욱 그가 그립다. 새로 세운 청마문학관에 가면 그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큼이라도 채울 수 있을까.
청마는 그랬다.
“여기에 오면 나도 어부가 되고 싶다 / 그리하여 저 대해(大海)의 심산유곡으로 헤치고 나아가 / 억센 그들과 맞싸우며 그들을 모조리 잡아 비끌어 오고 싶다”(청마의 시 「어시장에서」)고…….
사람들이 통영에 오면 그리움의 사람이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 같다. 언젠가 젖먹이 아이와 한참을 놀아 주고 나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차를 타고 얼마 동안을 간 곳이었는데 내 몸에서 아기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안고 놀았던 사이에 아기 냄새가 몸에 배었나 보다.
통영은 예향이다. 그것은 산자수려함뿐 아니라 그 곳을 빛내 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곳을 통해 맑고 깨끗한 성정에 젖었고 또 그렇게 청명한 사람이 되어 그의 주위까지도 청정하게 만들었다. 겨우내 얼어 있다 봄이 가까워지면 얼음장 밑으로 녹아 흐르는 산골 물 같은 맑고 시원함이 너른 바다에서도 느껴지는 곳, 비록 통영에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잠시 안아 주었던 아기에게서 배어나던 아기 냄새처럼 내게서도 분명 통영 냄새가 솔솔 풍겨 날 것 같다.
함께 있어도 그리운 곳, 하물며 떠나가면 오죽 더하랴. 고향도 아니면서 이만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건 아름다운 풍경만은 아닐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다음 번에 오게 될 때는 나도 오렌지색 모자를 쓰고 올까 보다. 그럼 더욱 정감이 넘치지 않을까. 마지막 둘러보기인 해저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망산 위에 머물던 낮 해가 통영을 둘러본 느낌이 어떠냐는 듯 환한 웃음 가득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