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시접 / 정경자

cabin1212 2017. 6. 23. 06:27

시접 / 정경자  

 

 

 

밤이 이슥하도록 시댁은 시끌벅적했다. 어머니 혼자 계셔서 고적하던 집안이 시동생의 때늦은 결혼으로 모처럼 사람 사는 집 같았다. 뒤풀이도 끝나고 시댁에 남아 주무시고 가실 몇몇의 친척들만 남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눕거나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무리 속에 미동조차 않는 이가 이었다. 잔칫집이면 으레 질펀한 술자리 끝에 노랫가락과 한바탕 춤사위로 어우러질 만도하련만 큰댁의 형님은 하루 종일 침묵할 뿐이었다. 누구보다 작은 집 '막내 되림'의 혼사를 학수고대했던 손윗동서였는데 가타부타 말이 없다. 질부姪婦가 저고리를 벗겨주는 대로 멍하니 몸을 내맡기는 형님은 치매를 앓고 있다.

"저고리 이리 주게."

그녀의 저고리를 받아 쥐고 옷걸이에 걸려던 내게 문득 적삼의 옆선이 눈에 들어왔다. 곱게 다물어져 있어야 할 솔기가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형님처럼 올이 미어져 곧 해질 것만 같았다.

형님이 지나온 삶의 질곡을 들여다보니 저고리의 시접을 닮았다.

청송읍에서 이름난 부잣집의 고명딸이었기에 유년에는 손끝에 구정물 한 방울 튀기지 않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 소싯적의 호사가 노랑저고리에 꽃분홍치마 같은 시절이었다면 그녀의 시집살이는 행주치마 같은 세월이었다. 읍에서도 두어 시간 가량 더 들어가야 하는 두메산골에 땅 부자로 부풀려진 집안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시골에서 땅이 많다는 이야기는 곧 일이 많고 거느려야 할 식구도 많다는 말이다. 곱게 자라 그녀가 엄살 한번 부릴 법도 했지만 농사, 살림, 자식의 일까지 어느 것 하나 데면데면 하는 법이 없었다.

반면에 한집안의 장손이며 가장이었던 아주버님은 집에서 연장을 손보거나 들일 나가는 것보다 하얀 모시적삼에 중절모차림으로 읍이나 면소재지로 출타하는 일이 더 많았다. 바깥출입이 잦았던 남편을 대신하여 파종부터 추수에 이르기까지 놉을 맞추고 곁두리를 내가는 일은 거의 형님의 일과였다.

어쩌다가 집안 잔치가 시내에서 벌어져도 늘어진 술자리를 아쉬워하는 아주버님과는 달리 식사만 끝나면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형님이셨다. 농부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은 밭에 잡초가 웃자라고 농작물에 병이 깊어지는 시간이라며 휑하니 나가는 형님이 모처럼의 잔치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못내 섭섭할 때도 있었다.

거의 다달이 끼어있는 큰댁의 기제사 참석은 나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끔 명절 때에나 들른 형님 댁은 비록 시골의 묵은 세간이었으나 티끌하나 없이 반들반들했다. 뽀얗게 삶아 마루에 얌전히 개켜진 걸레는 도시생활에서 편한 것만 찾아 대충 살림을 때우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오래전에 상처하신 시아버지가 노경에 들어 재혼을 하셨다. 몇 해 뒤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홀몸이 되신 새어머니의 봉양도 고스란히 형님의 몫으로 남았다. 그 일도 불평 한마디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에 친지들은 '똥도 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아주버님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상처받은 자식들이 뻗나갈세라 마음 다독이는 일도 형님에겐 지뢰밭을 밟는 심정이었으리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볼품없이 실밥이 너덜거려도 시접이 없다면 옷은 옷이 아니라 한낱 헝겊조각에 불과하다. 층층시하 시집살이와 육촌만 모여도 백 명은 족히 넘는 대식구. 그 중심에 서있는 종부의 고충이야말로 열두 치마폭엔들 다 담을 수가 있을까?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앞길과 뒷길을 붙이고 길과 소매를 잇듯 의지의 끈으로 마음을 봉합하였을 것이다. 안으로는 공경과 자애를, 밖으로는 근면으로써 스스로를 독려했으리라.

한복의 시접이란 길과 소매를 잇거나 품을 늘리는 것이지만, 상고시대부터 옷이 귀했던 근세사에 이르기까지 재활용의 역할이 더 컸다고 한다. 한필의 원단을 폭은 자르지 않고 몸의 치수나 팔 다리 길이대로 마름질하여 옷을 만든다. 입던 옷을 뜯어서 빨고 푸새질하여 다시 바느질할 때는 그동안 불어난 몸집에 맞추거나 계절에 따라 솜을 누비거나 홑옷으로 만들었던 것도 솔기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치매가 찾아온 이후 형님이 가족에게 힘을 실어주던 재활의 기능은 마비된 셈이다.

그동안 형님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는지 여섯이나 되는 조카들은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출가를 해 평범한 삶을 그럭저럭 잘 이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아주버님이 농사일이 힘겹다며 선산을 제외한 문중 땅을 헐값에 넘기고 도심으로 이사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형님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질부의 전화가 온 것은 큰댁이 도시의 아파트로 이사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챙 넓은 모자에 수건을 둘러쓰고는 아파트 마당의 잔디를 호미로 파헤치거나 정원의 꽃을 모가지 째 따다가 치맛단에 담곤 했다. 그 때문에 경비실의 호출도 빈번했던 모양이다. 생각다 못한 아주버님이 장조카 네와 살림을 합쳤지만 그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올해 고추농사 잘 돼야 큰 아 등록금 만들지…….”

거실에 깔아놓은 대자리 위에 장롱의 옷가지들을 죄다 늘어놓으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기억은 십여 년 전 가뭄이 극심했던 그 해 여름 끝자락에서 타들어가고 있었다.

형님은 아주버님보다 땅에 더 의지하셨던 것 같다. 아주버님은 아주버님대로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었다는 자격지심에 풀이 죽은 지도 오래다. 젊은 시절, 집안을 지키는 아내가 있었기에 양복이나 모시적삼에 백구두를 차려입고 출타하는 보무도 당당했으리라. 그 때만 해도 끼니때마다 아내의 입에 밥이나 찬을 넣어주고 얼굴 닦아주는 것으로 속죄하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풀 약 쳐야 되는데……보소, 오늘 비 온다 카등교?"

", 비 온다 카디더."

잠잠하던 형님이 새퉁스럽게 내뱉는 말에 아주버님도 늘 해오던 일 인양 대꾸를 한다.

누구의 제삿날, 아무개의 돌날, 잔칫날을 앉은 자리에서 줄줄이 꿸 만큼 그녀의 기억력이 펄떡펄떡 살아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친척집에서 하룻밤 묵고 갈 만큼의 여유도 없어보였다. 의식의 한쪽이 희미하게 지워진 지금에서야 일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듯 조금은 여유로워 보인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므로 아주 잠깐 몸도 마음도 휴식하라는 절대자의 배려였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잠시 외출에서 돌아온 듯 평상심을 되찾았으면 더욱 좋겠다.

마루에서 긴 잠에 빠졌던 재봉틀을 끄집어냈다. 반짇고리를 뒤적여서 손바닥만한 모시자투리를 찾아냈다. 딱 맞게 가위로 잘라 적삼 옆선에 덧대었다.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던 솔기가 행여 해질세라 박음질하는 손길이 더 조심스럽다.

비록 의식은 희미할지언정 육신만이라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시라는 나의 바람을 형님께 두 번 세 번 확답이라도 받을 듯 곁바대를 눌러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