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가슴 내어준 죄 / 김혜식
가슴 내어준 죄 / 김혜식
귀는 전혀 없습니다. 밝은 귀 대신 온 가슴으로 듣는 비법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슴으로 그 수많은 언어들을 들을 수 있는지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드릴까 합니다. 그 비결은 간단합니다. 어디서든 제 평평한 가슴을 망설임 없이 반듯하게 여러분 앞에 드러내는 게 그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제 가슴 위에 온갖 세상사를 올려놓고 힘차게 자르고, 다지고, 이겨대곤 합니다. 마치 맛있는 요리를 할 때 식재료를 썰고 다질 때와 흡사합니다. 이때 저는 수많은 구설수, 아름답지 않은 말들의 주재료가 가슴 위에 올리어져도 조금치도 반항을 할 수 없다는 게 매우 안타깝습니다.
요즘 제 가슴 위에 오른 반갑지 않은 재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높은 분 후광을 업고 국정을 떡 주무르듯 주무른 어느 여인의 빗나간 행위를 비롯,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안 된 젊은이들 탄식 소리,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무분별하게 신축하여 미분양 사태가 우려된다는 이야기, 택시기사가 젊은 여성을 성폭행 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용돈을 적게 준다고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칼끝을 들이댄 패륜 소식은 평평하던 제 가슴을 한껏 움츠러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위에 나열한 일들이 처음 제 가슴 위에 올리어질 때마다 참으로 불편했습니다. 눈만 뜨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속성 탓임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죄악을 저지르는 데는 심리적 측면이 많이 작용한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 인간은 마음의 지배를 외면할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심리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별다른 의미가 없던 것도 자주 접하면 정이 들어 호감이 가기 마련이란 인간 심리학에서 적용되는 ‘에펠탑 효과’라는 게 있더군요. 역시 제겐 이것도 작용할 뿐입니다. 제 가슴 위에 놓이는 숱한 언어들이 질적, 양적으로 썩고 부패하여 첫인상이 썩 안 좋았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말하는 ‘부적 첫인상’ 현상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세상엔 많은 일들이 시시때때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즈막 각박한 세태 탓인지 미담보다는 사건, 사고가 많이 발생하여 사회에 대한 불안 및 불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가슴을 훈훈하게 덥히는 따뜻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희귀병을 앓는 어린이를 돕기 위해 익명의 시청자들이 선뜻 거금을 내놓았다는 텔레비전 방송 내용은 그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제 가슴에 온기를 돌게 합니다. 독거노인들을 위하여 혹한에 연탄을 날라주었다는 학생들 자원봉사자 이야기는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 저 또한 신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삶이 팍팍해지자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빛을 발하고 있지만 세상사는 늘 새로운 형태를 갖추고 신문지상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현상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과잉으로 단순화시키려고 몹시 안간힘 써 보지만 제대로 안됩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패악들이 지능화되어가고 조직화되어 더욱 그렇습니다. 교수가 금력, 권력에 편승하여 국정 논단의 주범인 여성 딸 답안지를 대신 써 주었다가 법망에 걸려들기도 했습니다. 지성인의 상아탑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자질이 의심스러운 내용입니다. 이로 보아 때론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 법치국가라는 말이 무색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 모든 게 인간의 그릇된 욕심에서 비롯된 게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저도 이런 썩고 문드러지고 악취가 심한 언어들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것들이 품고 있는 오염된 공간을 떠날까 합니다. 인내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 가슴 위에 올리어져 난도질 당하는 숱한 언어들로 인해 폐해가 심각해서 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사의 예리하고도 음습한 칼날이 제 가슴에 깊이 칼자국을 남기어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습니다. 인간만이 안전을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비록 무생물인 제 몸이지만 저도 인간 못지않게 세상사로 인하여 내, 외적으로 안전을 위협받고 있기에 이를 피하려는 본능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급기야는 인간처럼 일명 환치, 전위라고 불리는 방어기제를 행하여 볼까 합니다. 옛말에 ‘동대문에서 얻어맞고 서대문에 가서 화풀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제게도 인간이 지닌 치환의 기제가 잠재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이용해 시방 제 감정을 보호하고 있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여러분들 앞에 그동안 참아온 고초를 토로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제 감정의 희생양(scapegoat)인 제 3의 대상인 여러분 앞에 대리 해소를 위해 이렇듯 넋두리를 하고 있음을 널리 향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참에 제 몸 위에 놓였던 온갖 아름답지 않았던 지난날 언어들을 밖에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에 깨끗이 씻어서 제대로 된 치환을 해볼 작정입니다.
치환을 꿈꾸노라니 저도 뉘우쳐지는 게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제 가슴을 아낌없이 내어준 죄가 그것입니다. 그동안 제 가슴 위에 올리어진 수많은 세상사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제 가슴이 항상 평평하기 때문이라면 구차한 변명일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그 평면 위에 당신들의 하루 세 끼 식사에 필요한 요리 재료만 놓아 줄 수 없는지요? 아니, 정히 제 가슴이 또 필요하면 사람답게 사는 이야기만 올려놓으세요. 그때는 그로 말미암아 받는 상처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답니다.
더 이상 “도마 위에 오르다.” 이 불명예스러운 말들이 항간에 떠돌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원칙, 기본, 윤리, 법도가 바로 서는 삶을 영위하기를 저는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주방의 조리 기구 도마인 저도 인간적 냄새 물씬 풍기는 일들만 여러분들이 제 가슴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목하 기도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