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지퍼에 대한 단상 / 심선경

cabin1212 2018. 2. 24. 06:23

지퍼에 대한 단상 / 심선경  

 

 

 

간밤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보니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가까운 태권도장 아이들이 기합을 넣으며 발맞춰 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출근시간이 임박하다.

 

허겁지겁 서두르며 겉옷의 지퍼 고리를 급히 올렸다. 발이 쉰 개라 하여 쉰바리라고 불리기도 하는 노린재의 무수히 많은 발처럼, 지퍼의 걸쇠들은 고리가 제 앞에 도착하는 것을 신호로 곧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줄 것 같은 자세였다. 그들은 더듬이가 없는 대신, 다른 신경을 한층 곤두세운 듯했다. 예상대로였다면 다음 순간에 분명히 보았어야 할, 쉰바리의 쾌속질주 장면을 나는 목격하지 못했다. 고리를 너무 힘껏 잡아당긴 탓인지, 옷감의 솔기가 고리의 틈으로 끼어들어 지퍼의 길을 막아버리고 만 것이다.

잘못 끼어든 솔기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솔기가 빠지기는커녕, 도리어 고리에 꽉 맞물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다급한 마음에 고리를 잡고 한 번 더 힘을 주어 위로 당겼다. 이 같은 힘과 속도라면 옷감 솔기 정도의 장애쯤이야 단숨에 뛰어넘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손아귀에 단단히 잡혀 있던 지퍼의 고리는, 그만 궤도 이탈을 하고 만다. 아직 달려갈 준비가 덜 된 말 잔등에 빨리 달리라고 채찍을 내리친 꼴이다. 지퍼가 나란히 선 걸쇠의 발을 맞추기도 전에 내 마음은 벌써 저만치 앞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지퍼는 계단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위로 나란히 이어진 층계를 차근차근 하나씩 밟고 올라야 목적지에 닿도록 설계해 두었던 것이다. 성급하게 빨리 오르려고 수십 개의 계단을 훌쩍 건너 뛰려한 내게, 지퍼는 보란 듯이 일침을 놓았던 게다.

갈 길 바빠진 시간이 자꾸만 도끼눈을 뜬다. 생각지도 않았던 아주 사소한 것들의 반란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뻗대는 계단들을 화해시켜 보려 하지만 한번 뒤틀린 심사가 쉽게 풀어지기는 힘든가 보다. 아래에서 위로 힘껏 잡아당기면 당길수록 지퍼의 문은 더 넓게 열리는 것이었다. 걸쇠의 순서가 뒤틀리자 더 이상의 추진이 어려워진 지퍼 고리는 망연자실 저지선에 걸려 멈춰 서 있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지퍼의 자세, 흡사 영어 알파벳 y를 떠올리게 한다. 참을 수 없는 거만한 포즈다. 그 거만함이 도를 지나쳐 이제는 바로 서기조차 거부하며 아예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다. 속으로 헛웃음이 난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랄까.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지퍼의 속성을 이해해보려 무척이나 고심했다. 과학적 지식은 깊지 않지만 온갖 궁리를 끌어다 붙였다. 이건 초등학생도 아는 기초상식일 무게다. 어떤 물체를 원래의 자리에서 다른 위치로 옮겨놓기 위해서는 일정한 양의 힘을 써야만 한다는 것, 직접 들어 올리는 방법, 도르래를 이용하는 법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퍼의 원리는 빗면을 이용하여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등산을 할 때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시간은 적게 들지만 무척 힘이 든다. 반대로 경사가 완만한 길을 걸어 올라가면 시간은 오래 걸려도 훨씬 힘이 적데 드는 이치처럼 여기에도 그런 원리가 적용된 듯하다. 살아오면서 완만한 경사지를 돌아가기보다는 시간이 적게 드는 가파른 길을 즐겨 올랐던 내가 빗면의 원리를 이용한 지퍼의 속성을 체득하기엔 무리였을까.

지퍼의 길을 다시 열기 위해, 잔뜩 골이 난 걸쇠들과 타협하기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길 옆 세탁소에 맡긴 다른 정장 바지는, 급할 것 하나도 없는 주인아저씨의 느긋함에 아직 그늘에서 꾸물꾸물 건조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이제껏 내가 위로 힘껏 잡아당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지퍼의 고리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성마르고 남과 타협하기 싫어하며, 누구보다 빨리 정상에 올라 깃발을 높이 쳐들기를 원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그런 불규칙적인 계단을 만들어놓은 사람 또한 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등한 힘의 안배가 끝까지 이뤄져야 지퍼의 문을 제대로 닫을 수 있듯, 삶의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단순한 이치도 깨닫지 못하고 걸쇠들을 무조건 억센 힘으로 다스리려 했던 나는 얼마나 거만하고 어리석은 존재였던가.

이쪽과 저쪽이 잘 맞물려 곧은 자세로 서 있기를 바라지만, 아직 나는 틀어진 지퍼 걸쇠의 발을 가지런히 놓는 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마음을 다잡고 살살 달래보기라도 했다면 고분고분하게 길을 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고장이 난 지퍼를 보며 매사에 계획성 없고 정돈되지 못한 내 모습을 그 위에 겹쳐본다. 둘 다 서로의 못된 속성만 쏙 빼닮았다.

그 날 성급함이 만든 엉망진창이 된 계단을 어떻게든 딛고 올라 가보려 했지만 걸쇠들은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서주지 않았고, 지퍼가 열어놓은 넓은 문은 끝내 닫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