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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동백꽃 위에 서설은 내리고 / 박찬란

cabin1212 2018. 3. 12. 06:32

동백꽃 위에 서설은 내리고 / 박찬란

 

 

 

동백 꽃잎 위에 이월의 봄눈이 사각사각 내리고 있다. 입춘도 지나 내리는 눈은 마치 뜻하지 않은 행운 같아 아이처럼 마냥 즐겁다. 지금 창 밖에는 하늘에서 축복이라도 하는 듯 떡살 같은 눈꽃송이가 하염없이 쏟아져 어느새 소담스럽게 쌓여간다. 포근한 햇살의 미소와 함께 오는 서설(瑞雪)이라 반갑기 그지없다. 백설은 처녀의 순결처럼 느낌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어둠이 깊으면 아침이 멀지 않듯이, 겨울의 매서운 한파도 어느새 대지(大地)의 문을 열고 새싹을 틔울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춘심(春心)에 동하여 마음이 새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고등학교 겨울방학 바로 이 무렵 같다. 고향 영주에서 출발한 기차는 김천에서 갈아타고 대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대전에는 고종사촌이 살고 있다. 방학이면 동갑내기 친척이 있어서 놀러가곤 했다. 이성(異性)인 친척이 있어서 동성(同性)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세계를 교류할 수 있어 부모님을 졸라 며칠을 즐겁게 놀다오곤 하던 시절이었다.

창 밖에는 오늘처럼 간간이 눈발이 내리고 있었는데, 어떤 중년의 남자가 미색 바바리에 큰 가방을 들고 남자 아이의 손을 잡고 열차에 오른다. 무심코 쳐다보았는데 우연인지 나와 함께 동석하지 않는가. 처음에는 어색해서 창밖 경치만 내다보고 있었는데, 홍익매점 아저씨에게 찐 계란과 과자를 사고 있다. 계란 한 줄을 건네면서 말문을 트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뜻하지 아니하게 아저씨의 가슴 저미는 슬픈 사랑의 스토리를 알게 되었다.

J, 이 도시는 지금 아저씨의 처갓집이 있는 곳이다. 지금 아들과 아내의 기일(忌日)을 지내고 오는 중이며 장모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는 한파보다 더 매서운 말을 듣고 이 도시를 떠나고 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알기나 한지, 날씨마저 을씨년스럽다며 쓸쓸하게 미소 짓는다. 아저씨의 마음 안팎이 시베리아 벌판보다 춥게 보였다.

남자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도 시부모들의 반대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남자가 제대 후에도 변하지 않는 아들의 마음을 알았기에, 부모들은 정식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신랑부모들은 사랑하는 손자 앞에서는 모든 체면과 형식이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졌나보다. 그러나 많은 세월동안 사랑의 결실을 보기위해 인고의 시간이 여자의 마음에 깊은 시름이 돌이킬 수 없는 병이 되었던 것이다. 첫아이를 낳고 산후부종과 심한 우울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가엾게도 여자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외할머니가 키우다 딸의 기일 날 사위를 불러, 다시는 오지 말라며 아이를 데려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위를 보면 죽은 딸의 마음고생 한 것이 생각나고, 손자를 보면 '어미 잡아먹은 자식'같아 마음이 복잡하다며, 장모와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중이란다. 마치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가는 절박한 비애(悲哀)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죽은 지 3년이 지났어도 혼자 아이와 함께만 살고 싶단다. 아이가''엄마 어디 있어?"물으면, "저기 하늘나라에서 너를 지켜준단다." 두 부자의 정다운 모습에 괜히 콧등이 시려온다. 사별한 홀아비가 아이를 대하는 눈길은 마치 눈 속에 만난 사슴의 큰 눈망울을 보는 듯 마음이 아리다. 마치 죽은 아내를 대하듯이 미안함이 묻은 눈길이 따사롭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 절망 속에서 만나 아프게 상처만 주고 떠난 아내이기에, 더욱더 가슴이 미어진다며 우수에 띤 눈빛으로 차창 밖을 바라본다. 그의 옆모습이 연민으로 다가온다. 담배연기 속에서 애잔한 슬픈 연인의 영상이 처연하게 오버랩 된다.

중년의 대기업 간부가 되어 이제는 먹고 살만한데, 한 번도 마음 편히 못해 준 것이 죽은 아내를 마음속에서 도저히 떠나보낼 수 없다 하였다.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안고 떠났기에,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한 것이리라. 함께한 추억은, 세월이 갈수록 혹독한 겨울을 견딘 보리새순처럼 강하고 집요하게 평생 남자의 가슴을 헤집고 피어날 것이다. 혹한을 견딘 동백꽃빛이 더욱 아름답듯이 사랑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사랑- 사랑의 파랑새는 과연 무엇일까? 특별한 이성에게 마치 전깃줄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싶다. 온통 하루의 모든 시간들이 상대에게 쏠려 통제 불능의 운전대 같은 생활이리라. 그래서 사랑은 열병과 같다하지 않던가. 그것은 전생의 막강한 필연이 현실의 바람 같은 인연으로 날아오는 것이다. 나 역시 감전되듯 사랑을 해보았다. 그 사랑이 만개한 꽃일 때 떨어지면, 아쉬움이 두 배가 되듯, 지금의 아저씨는 사는 날까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다.

여자들은 변치 않는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랑도 현실에 살다보면 색깔이 바래진다. 그러나 사랑은 불 꽃 같다. 사랑이 변색되지 않으려면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사랑의 작은 불씨를 잘 다독여 꺼지지 않게 하는 것 또한 빛나는 지혜이리라. 만일, 죽는 날까지 사랑의 불씨를 간직한다면,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결실이리라.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을 하다가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사랑을 잃고 신 새벽 허공을 향해 피울음 토하는 가슴 붉은 새의 모습이 어쩌면 아저씨 사랑 같아, 문득문득 아저씨가 생각나곤 한다. 지금은 그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삶의 밭을 가꾸며 살고 계시는지?

봄의 길목에서 손님 같은 반가운 함박눈을 보니, 삶도 사랑도 한 떨기 눈처럼 쌓였다 사라지는 인생 같아 허허롭다. 하지만 아저씨의 사랑이 동백꽃으로 피어나듯, 나도 죽는 날까지 사랑나무를 키우고 돌보는 작업을 쉬지 않고 하리라. 사랑은 마음의 끝없는 에너지이다. 생활이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이라고 느껴질 때면, 아저씨의 사랑을 추억의 앨범 꺼내보듯 마음에 떠올려 사랑의 소중한 의미를 한 번씩 되새겨 보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이시간은 만질 수도 없는 이에게는 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며 살 일이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저씨도 저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면서 지난날의 회한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하늘 아래 이름 모를 곳에 살지라도 아저씨의 화안(花顔)으로 떠난 아내에 대한 사랑의 향기는 지금도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