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도마질 소리 / 구양근

cabin1212 2018. 4. 18. 05:48

도마질 소리 / 구양근


 

 

백두산은 북새통이었다. 30여 년 전에 왔을 때는 중국의 인민해방군 지프차가 백두산 정상 바로 밑까지 실어다 주어서 100m 남짓만 한가롭게 걸어가면 되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백두산을 왔더니 밑이고 위고 구부렁구부렁 대기용 u턴 쇠파이프 통로가 몇 겹씩 진을 치고 있어서 가이드의 깃발만 보고 따라가도 일행을 놓칠 판이다. 정상을 올라가서도 겨우 남들 어깨너머로 천지를 내다볼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인파에 이리저리 밀리며 생각하였다. 한국인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를 쓰고 백두산을 보려 할까. 거기에는 다른 외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고(중국인은 자기 나라니까 외국인이 아님) 100% 한국인이었다. 우리와 모양이 다른 서양인은 보기만 해도 금방 알아보지만 같은 동양인인 인도인, 몽골인, 일본인, 라오스인 등 어느 외국인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한국어만 산천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내가 이번에 만주기행에 동참하게 된 동기는 고구려 유적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 대여섯 번 만주를 왔지만 모두 독립군 사적지 탐방이었기 때문에 고대사 유적지는 볼 기회가 없었다.

나는 신열이 났다. 전에 독립군 사적지 탐방 때도 그랬지만 이번 고구려사 탐방에서는 더 큰 열병을 앓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집안(集安)의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서 오호분오호묘를 볼 때는 발을 헛딛고 넘어질 뻔하였다. 오호분오호묘란 투구 모양으로 된 다섯 개의 묘가 있는데 그중에 다섯 번 째 묘란 의미이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서 풀래시를 비추고 벽화를 보는데 물이 새서 벽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고 천정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부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함께 설화적 내용의 신선도가 그러져 있고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三足烏)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색깔도 아직 빨파노의 구별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벽화가 모형이 아니고 고구려 때 그린 그대로의 원형이라는 데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저 그림이 버티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혹 몇 개월, 잘하면 몇 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방 흔적이 없어질 것은 정한 이치, 중국 가이드의 설명은 더 기가 막히다. 전에는 4호분을 개방했는데 4호분의 벽화가 훼손이 심각하여 지금은 5호분을 개방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은 4호분은 이미 훼손되어 버렸다는 것이고 5호분도 곧 훼손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부러 부수기는 그렇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 어서 다 망가져 흔적이 없어져 버려라 하는 중국의 의도가 분명했다. 능 밖의 설명문은 더 기관이다. ‘우산귀족묘(禹山貴族墓)’라고 써져 있다. 우산은 그곳의 산 이름이고, 이 거대한 석실묘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떤 꽤나 힘 있는 지방 세력가의 묘일 것이라는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은, 최근 연구결과로는 귀족 묘가 아니고 무당적인 의미의 어떤 장소였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한다. 어떤 귀족이 어떤 무당이 세계를 휘어잡았던 고구려의 국가를 상징하는 사신도, 신선도, 삼족오를 석실 벽화에 그려 넣었단 말인가?

하기야 그들이 무슨 선심이 발동하여 자기들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은 고구려를 사실대로 연구해줄 필요가 있겠는가. 광개토왕비를 볼 때는 기가 차서 허어! 허어!’하는 탄식만 새어 나왔다. 밖의 설명문에는 호태왕비라고만 되어 있었다. 원명은 광개토호태왕비인데 중국 하나의 지방에 불과한 곳에서 무슨 국토를 넓힌다는 광개토라는 말이 될 법이나 하는 소리냐며 멋대로 빼버린 것이다. 기념품 상점에서는 광개토왕비의 모형을 돌로 만들어 장난감처럼 필고 있었다. 나도 하나 샀더니 설명문까지 서비스로 주는데, 거기에는 원문이란 것을 싣고 누가 번역했는지 조잡한 한글 번역까지 되어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신묘년래도-’이 문구를 보니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한국어로 버젓이 번역해 놓았다. 신묘년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반대로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말한 대로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신라를 신문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광개토왕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일본에 유리하게 하고 고구려에 불리하게 적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어서 이 지역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지방의 어느 관광지인 줄 알고 V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아무 교양도 없어 보이는 중국처녀들이 보기 싫다. 시커멓게 탄 노무자들이 마음대로 자기들 돌을 가져와 아무렇게나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이곳은 세계 어떤 외국인도 오지 않고 오직 한국인만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음 조이며 우리의 옛 국토를 응시하는 곳이다. 중국은 백두산에서도 졸본성에서도 국내성에서도 한국의 애국가를 부를 수 없고, 만세를 부를 수 없고, 현수막을 걸고 사진도 찍을 수 없고, 기도 행위도 못하게 규제하고 있었다. 자기들의 땅에 와서 자기들의 유적지를 보고 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최근에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것을 하여 한강 이북까지 자기 국토로 편입시켜 놓았다. 중국의 한국을 요리하는 도마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리고 있는데,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에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