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습지 풍경 / 엄현옥
습지 풍경 / 엄현옥
낡은 수문이 있는 좁은 길을 지났다. 양편에는 갯벌이 과묵하게 앉아있었다. 갯벌은 바람과 갈대의 소요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갯벌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평소 같았던 걸죽한 암회색에서, 별안간 초록색이 되어버린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 대만의 화련 태로각太魯閣에 갔을 때다. 아시아의 그랜드캐년이라고 과장되게 불리는 협곡은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이 한 눈에 담기 버거울 만큼 아득했다.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던 계곡을 에둘러 흐르던 물은 온통 회색이었다. 시멘트를 물에 푼 것 같은 회색은 그곳이 석회암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갯벌이 초록색으로 변한 이유가 궁금했으나, '네이버'의 검색창을 열지 않았다. 지금껏 적나라한 근거와 논리에 무수히 설득 당해온 터, 신비로운 영역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 하나쯤 있어도 좋았다.
갯벌은 바다를 따라 나가지 않았다. 바다를 보내고 맞으며 제자리를 지켰다. 바다는 고작 한나절 후면 갯벌에 덥썩 안겼으므로 물썬 때에도 갯벌은 마르지 않았다. 갯벌의 흡인력에 난바다로 나아가지 못했다.
소금창고를 향했다. 남루한 창고는 바람과 햇빛에 나날이 여위어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지난 봄 지인과 소금창고에 온 적이 있다. 일행은 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에서 출사 나왔던 곳이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소금창고를 렌즈에 담기 위해 국철 1호선과 버스를 환승하고, 먼 길을 걸었던 그날의 추억을 장황하게 풀어놓았다. 그들이 한나절 만에 닿은 목적지가 언제라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과다하게 우쭐했다.
소금창고는 시간의 지성소至聖所다. 염부들의 염원이 담긴 소금의 종착역에는 고무래질로 저문 해를 맞았을 그들의 땀 냄새가 짠 바람으로 배회했다. 그들의 삶이 염장鹽藏된 창고를 오래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진화하지 못한 초식공룡처럼 뼈대 앙상한 창고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시간의 풍화와 침식을 견디며 간신히 지탱해온 의지가 흔들릴 것이다.
갈대 무성한 습지에는 탐조대가 즐비하다. 내 편에서만 새를 보거나 촬영할 수 있는 눈가림막이었다. 새에게는 사생활 보호의 필요성이나 초상권이 없는지 출사 나온 이들은 저마다의 포커스로 새들을 조준했다. 인공구조물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염전이었을 갈대 숲을 걸었다. 시간의 만장挽章인 듯 저만치에서 소금창고의 녹슨 양철지붕이 바람에 파닥거렸다.
도시가, 현재가, 미래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