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붉은 벚꽃 / 한경희
붉은 벚꽃 / 한경희
모주는 달달하면서도 구수했다. 그날은 알코올기가 완전히 빠져 나가지 않아 목 안이 쏴 하며 기분이 들떴다. 술기운 탓이었는지 어른들은 첫사랑을 추억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나 물었다.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그럼, 아직도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
할머니는 모주를 한 잔 더 마시고는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풀었다. 소녀는 열세 살에 엄마를 잃었다. 그날로 동생 다섯을 건사하고 살림을 도맡았다. 관공서에 다니는 아버지는 유난히 소녀를 귀애했다. 첫정이기도 했지만 손에 물 마를 새 없는 어린 자식에 대한 애틋함이 컸으리라. 소녀도 아버지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새 장가 드는 게 싫어 엄마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짝을 잃은 남자의 외로움을 어린아이가 어찌 이해했겠는가. 젊은 홀아비는 결국 일 년을 버티지 못했다. 새엄마를 맞은 후 소녀는 부엌살림에서 벗어났지만 눈물바람인 날이 더 많아졌다.
소녀가 열여섯 되던 해였다. 해마다 보던 꽃들이 예사로 안 보이고 이유 없이 서글퍼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즈음 가까워진 옆 동네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들어서는데 마당 한쪽에 키가 훤칠하고 귀티가 나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창백하리만치 뽀얀 얼굴이었다. 서울에서 휴학하고 내려온 친구 오빠였다.
소녀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상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깊고 섬세한 눈이었다. 소녀는 왠지 부끄러워져 친구에게 볼 일을 잊었다 말하고는 집으로 내달렸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건 뛰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소녀는 오빠의 모든 것이 좋았다. 특히나 짧게 자른 뒤통수를 보면 어찌나 마음이 설레던지 그 푸르스름하고 까슬한 머리를 한 번만 쓸어보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웃을 때마다 오빠의 하얀 목덜미에 새파란 힘줄이 핏줄이 비쳐 오르면 심장이 뜨거워졌다.
친구네 집에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오빠를 보면 볼수록 소녀는 더 애가 탔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빠를 떠올리고 낮에 봤던 모습을 그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여름에도 몸이 두둥실 떠다니는 봄날 같았고 겨울에도 바람이 시리지 않았다.
오빠도 소녀가 싫지 않았던지 귀엽다며 방싯 웃어주기도 하고 가끔 제 동생과 앉혀 놓고 대학 생활도 말해줬다.
"넌 웃을 때 잇속이 참 예쁘다."
소녀를 빤히 쳐다보던 오빠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줄 몰라 하는 소녀에게 코를 찡긋해 보이고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흩트렸다. 그날 밤 소녀는 머리를 쓸고 간 그 부드러운 손의 감촉을 되새기느라 꼬박 날을 밝혔다.
일 년 남짓 고향에 머물던 오빠는 다시 서울로 갔다. 그새 소녀는 누가 요술이라도 부린 양 훌쩍 자라 있었다.
열여덟이 되던 해, 자신의 몸이 얼마나 예뻐졌는지 자각할 새도 없이 혼담이 오갔다. 새어머니가 결혼을 서둘렀다. 상대는 한국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스무 살 재일 교포 청년이었다. 남몰래 신랑 될 사람을 보러 간 소녀는 그를 보자마자 얄궂게도 오빠가 떠올랐다. 갑자가 가슴 한복판이 시큰해지며 뜨거운 물이 고였다. 소녀는 무작정 친구네로 향했다.
언제 내려왔는지 거짓말처럼 오빠는 처음 모습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소녀는 반가우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사모하는 이를 두거 딴 맘을 먹었던 것마냥 느껴지기도 하고, 혼삿말이 오가는 자신이 순결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소녀는 그날 이후 친구네 집에 발길을 끊었다.
혼사가 성사되고 결혼 준비로 분주할 때였다. 불현듯 소녀는 오빠를 꼭 한 번은 만나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벚꽃이 하르르 지던 날이었다. 그새 서울로 갔으면 어쩌나 조급증이 인 소녀는 한달음에 친구네에 도착했다. 마당가 벚나무에서 꽃잎이 날아와 소녀의 발 앞에 떨어졌다. 대문 사이로 벚나무 아래 앉아 있는 오빠가 보였다. 갑자기 그 모습이 꿈결같이 아슴푸레해서 차마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담 모퉁이에 얼마나 서 있었을까.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워 주저앉고만 싶었다. 소녀가 용기를 내어 마당으로 한 발 들이밀던 순간, 오빠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매섭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에는 오빠의 입술 주위로 떨어지는 게 붉게 물든 벚꽃잎으로 보였다. 빠알간 꽃잎이 두 손에 흥건하게 고일 때까지 소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오빠의 길고 긴 각혈이 끝났을 때 소녀는 고개를 돌려 집으로 뛰었다. 처음 오빠를 봤던 그 날처럼.
"벚꽃이 얼마나 이쁘게 지던지…. 집으로 가는 내내 어찌나 서럽게 지던지…. 근디 말여. 그때 내가 뒤도 안 보고 나온 일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겄어."
모주를 한 잔 더 마신 할머니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할머니, 그 오빠는 어떻게 됐어? 죽었어?"
첫 아이 산후조리가 끝난 후, 할머니는 식구들 몰래 그 집에 한 번 가보았다고 한다.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고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거로 봐서 오래전에 이사한 것 같더란다. 물어물어 소식을 알 수도 있었지만 부러 그러지 않았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가슴에 붉은 사랑을 찍어두고 벚꽃이 필 때마다 펴 보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다음에 할머니를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지금도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나온 게 잘한 일이라 여기는지, 아닌지. 그럼 할머니는 모주를 마시던 그때처럼 다시 얼굴을 붉히려나. 진짜 할머니가 된 지금도 다시 여자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