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꽈리 / 박영자
꽈리 / 박영자
ㅊ선생이 들고 온 꽈리 단을 백자항아리에 걸쳐 꽂았더니 색이 참말 곱다. 눈이 부시도록 흰빛에 주홍빛이 참 잘 어울린다. 금방 물감ㅇ르 풀어 단아한 그림 한 폭 남기고 싶은 충동이 인다. 가을이면 꽈리 단을 잘 사다 꽂았는데 ㅊ선생 어떻게 내 마음을 꼭 집어 알고 그걸 사왔을까. 아, 참 그러고 보니 짐작이 가는 일이 있긴 하다.
지난 봄 산행을 하고 오는 길에 관음사 뒤쪽 담장 밑에서 꽈리 한 포기가 눈에 띄었다. 겨우 한 뼘도 채 자라지 않은 것인데도 금방 꽈리인줄 알아볼 수 있었다. 꽈리 잎은 가장자리에 톱니가 나 있는 게 눈에 익다. 한 포기가 외로운 걸 보면 절에서 일부러 심은 것 같지는 않기에 캐다가 화분에 심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햇빛이 모자랄까 염려되어 창밖 에어컨 박스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가꾼다고 해 보았지만 자리를 옮겨서 타관을 타는지 맨 그 타령으로 쑥쑥 자라질 못하고 무녀리마냥 주춤거린다. 실하게 줄기를 벋고 가지를 쳐서 꽈리가 주렁주렁 열렸으면 하는 마음에 꽤 큰 화분에다 심었는데 내 기대와는 정반대로 지실을 타니 실망이 컸다. 우리 집에 놀러온 ㅊ선생에게 꽈리를 보여주며 잘 자라지 않는다고 푸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을 주다보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꽈리 나무가 옆구리에 노리께한 작은 꽃 한 송이를 피우고 보란 듯이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대견하여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 꽃이 작은 꽈리 열매가 되어 커 가는 동안 남편은 내가 너무 눈독을 들인다며 그러면 열매가 떨어진다고 무관심해야 잘 자란다며 훈수를 둔다. 그것이 주홍빛으로 익는 것을 지켜보며 아이를 키우듯 즐거웠다. 겨우 한 개지만 수확을 한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것을 똑따서 속을 파내고 어린애처럼 꼬르륵 꼬르륵 불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고 씨앗 바구니에 넣어 말리는 중이다. 그 때 내 마음을 잊지 않은 ㅊ선생의 정스러움이 더 고맙다.
꽈리를 등롱초燈籠草라고도 한다더니 꽈리 단이 밤길을 밝히는 청사초롱마냥 조롱조롱 매달려 거실이 환하다. 그 중 한 개를 골로 초롱같은 껍질을 살짝 벌려본다. 구슬처럼 둥근 열매가 전설 속의 소녀처럼 수줍다. '꽈리'라는 소녀는 옥구슬을 구리듯 노래를 잘 부르는 가난한 집 딸이었다지, 부잣집 딸의 시기에 원님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그것이 부끄러워 목숨을 끊은 소녀의 넋이란다. 왜 꽃에 대한 전설은 하나같이 주인공이 죽고 그 무덤에서 자라난 한 포기 풀로 끝을 맺는 걸까.
수십 년 전의 기억들이 와르르 몰려온다. 외갓집 장독대 옆에 수북하게 돋아나던 꽈리, 열매가 미처 익기도 전에 새파란 것을 따서 바늘로 속을 파내면 왜 그렇게 소태처럼 쓰던지, 까닥하면 구멍이 나거나 주둥이가 찢어져서 실패하기 십상이었다. 어찌어찌 응어리를 파내고 물에다 헹구어 입안에 넣고 공기를 들이마시면 꽈리는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고 그것을 아랫입술에 대고 윗니로 지그시 누르면 '꼬르륵 꼬르륵' 얘쁜 소리가 났다. 지금 아이들 꽈리 부는 것을 못 보지만 그때는 무료하던 여자애들의 좋은 장난감이었다.
바마루 고개 아래 외딴집에 살던 이름도 까마득히 잊은 그 계집애는 까닭 없이 "내일 내가 꽈리 두 개 갖다 줄게"로 비굴하게 내게 다가왔다. 그 이튿날이 되면 꽈리는 그림자도 없고 두 개에서 곱절인 네 개로 늘어난다. 네 개는 여섯 개로, 여덟 개로 계속 늘어나다보면 숫자는 우리 실력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수 백 개까지 늘어난다. 그때 우리는 구구단을 처음 외던 2학년 때였으니 말이다. 꽈리 받기는 애시 당초 틀린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계집애의 거짓말이 싫고 비굴함이 싫어서 학교가 파할 때면 기어코 계산을 해서 공책껍데기에 쥐어주듯 개수를 적어주며 내일은 꼭 가지고 오라고 오금을 박곤 했다. 그 때 우리들의 계산은 맞기나 했을까. 쥐 파먹은 것처럼 볼품없이 머리를 깎고 다니던 '용'자가 들어가던 그 친구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꽈리를 살짝 돌려 떼어낸다. 엄지와 검지로 살살 주물러 말랑말랑하게 되니 표피 속에 하얀 씨앗들이 비쳐 보인다. 이쑤시개로 주둥이를 꼭 찔러 입에 대어본다. 새큼달큼한 맛에 입에 침이 고인다. 주둥이를 조심스럽게 파내고 응어리를 쏙 빼는 것이 고비다. 입안에 넣고 어린애처럼 '꼬르륵 꼬르륵' 불어본다. 외할머니는 집안에서 꽈리를 불면 뱀이 나온다고 했었지. 그럴듯한 거짓말에 잘도 속아 넘어갔었다. 싫도록 꽈리를 불어본다. 남편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놀리지만 오늘은 이대로 어린애로 돌아가고 싶다. 실컷 불고 나서는 옛날에 했던 것처럼 종지에 물을 떠서 꽈리를 담근다. 그냥 두면 바싹 말라 버려 못쓰게 되니까 말이다.
아, 좀 더 커서 내가 도시로 이사 왔을 때는 고무꽈리가 있었다. 겉에 화려하게 꽃그림을 그린, 그냥 놔두어도 발랑 부풀어 오르던 고무꽈리는 고무냄새도 나려니와 보드랍게 입에 착착 붙던 진짜 꽈리만 못했던 대용품이었다. 그래도 시골에 두고 온 추억을 반추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꽈리는 약으로도 썼다. 목이 쉬거나 편도염이 생겼을 때 할머니가 꽈리를 먹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제는 '꼬르륵 꼬르륵' 귀엽던 꽈리소리는 고사하고 꽈리나무를 보기도 쉽지 않다. 모두가 사라진 옛 것이기에 그리움으로 남는다. 내 삶도 이제 성급하게 풋 꽈리를 파내던 쌉쌀한 어설픔에서 농익은 꽈리처럼 달큼한 맛을 내며 누군가에게 약이 되는 경지에 올라야 하거늘 그렇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오늘 ㅊ선생은 꽈리 한 단에 추억 한 단까지 사 들고 온 셈이다.
가을이 주홍빛으로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