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시간 채집 / 박미영

cabin1212 2018. 11. 7. 05:55

시간 채집 / 박미영  


  

 

책장정리를 하다가 미끄러진 책에서 압화(押花)책갈피를 발견했다. 황매화를 책 속에 넣어 말렸다가 코팅한 것이다. 20년 지났어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진노랑의 꽃잎 수는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선명하고 잎사귀도 색이 약간 흐릿할 뿐 잎맥이 선연하다. 네 잎 클로버도 같이 따라 나온다.

사춘기 때는 누구나 그러하지만 그 때 적었던 습작노트 한 쪽에 말린 풀잎이나 꽃잎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과거의 정감이 그대로다. 동네 밭가나 교정의 귀퉁이, 또는 귀가 길에 눈길을 붙잡았던 풀대나 꽃들이 감성의 희생물이 되어 주었다. 물감을 색색으로 칠한 상수리 낙엽과 담쟁이덩굴도 있는 것을 보면 여유도 만만해 보인다.

꽃잎을 같이 땄던 친구는 얼핏 자연보호와 생명의 존엄함에 대해 애기했던 것 같다. 나긋나긋했던 친구의 말투가 황매화의 잎맥처럼 귓가에 퍼져오고, 그때의 이야기들이 압화 된 꽃잎 뒤에서 촉촉하게 물기를 건져 올린다. 이미 코팅된 황매화는 시간의 화석인 셈이다.

20년 전의 봄이란 유해가 친구와의 흔적과 함께 묻혔다가 오늘 책들의 퇴적물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공간의 지표면으로 더 많은 화석을 발굴해내기 위해 과거의 책들 사이를 헤집어보지만 없다.

이사할 때마다 버린 책들과 과거의 상흔들이 보기 싫어 태운 일기장도 아쉬워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침울한 과거도 색이 바라면 보기 좋아지는 것일까. 한때는 시간의 짐이 버거워 스스로 뜯어내고 지워버린 흔적들이 그리워진다. 아주 가끔 과거라는 필름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재생하여 들여다보고픈 욕망이 불쑥불쑥 일어선다.

어떤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소싯적에 사람들이 우표나 옛날 돈을 모으는 것이 너무 부러워 과자포장지를 모으기 시작했었는데 그것도 자랑이 되더라고. 과자 가격이 달라진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나.

달라진 것이 어디 과자 가격뿐일까? 포장지의 디자인이나 문구, 들어간 원료표시만 보아도 시간의 변천과 생활모습의 다양성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포장지로 인한 과자 맛에 대한 향수는 그 때의 사람들을 불어올 것이고, 그 때의 사람들을 불러올 것이고, 그 때 나누웠던 대화를 끌어내올 것이 아닌가.

예전의 달력만 보아도 기분이 달라진다. 날짜 옆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 옆에 적었던 누구의 생일이며 결혼식이란 메모만 보아도 그 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마치 하나의 기호가 표상이 되어 의미의 덩어리가 되고 다시 산산이 부서져 추억들을 하나씩 데리고 나오는 것 같다. 달력 안에서 사진이 나오고 비디오가 돌아간다. 누구는 웃고 누구는 끝없이 이야기를 해댄다. 미처 달래거나 위로를 마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슬프게 서 있다.

가계부도 마찬가지다. 콩나물 값이라도 아끼려고 했던 과거의 지난한 살림살이가 빼곡한 증거들을 보면 현재는 참으로 풍족해 진다. 풀빵 30개가 천원이던 5일장의 참새방앗간이 일곱 개에 천 원인 가격으로 변할 때까지 그 사이 문턱에 찍은 발자국 개수는 과연 몇 개일까. 열무나 배추, 액젓과 양념들은 사서 담근 김치의 통은 또 얼마나 될까? 그 버무려진 양만큼 건강하게 살기는 했을까.

아마도 유년이나 청소년기의 일기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면 더 생생하고 명확한 과거를 읽어낼 수 있었으리라. 한 사람의 과거가 개인의 역사가 되고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 시대의 주류를 형성해 가듯 아주 작은 지류일지라도 무심하지 않다. 순간순간 찰나가 모여 영겁이 되고 우리는 그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인류공동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지 않은가?

사람은 시간이라는 평면 위에 공간이란 점의 이동을 찍으며 인생을 살아간다. 좌표처럼 지나온 점은 이미 선 안에 갇혀버리고 앞으로 펼쳐질 시간과 공간의 분면은 백지로 남아 있다. 숱한 일들이 있었고 수많은 공간의 이동과 전출입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인생 좌표는 여전히 허전하고 쓸쓸하다. 미시적으로 보면 빼곡한 점들로 점철되어온 개인의 역사도 멀리서 보면 한 점일 뿐이고, 하나의 커다란 실선에 불과하다.

순간순간 식물채집이나 곤충채집처럼 시간의 증거를 붙들어 놓고 싶다. 초등학교 시절 다른 애들이 잡지 못하는 장수하늘소나 사슴벌레가 채집 판에 꽂혀 있으면 위풍당당하게 개학을 했다. 뿌리까지 정연하게 말려 테이프로 붙인 식물채집은 정성의 증거였다. 장황한 설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증거가 곧 노력과 땀, 승리의 표본이 되었다.

거친 풍파와 고고하게 서 있는 계곡과 해안일수록 장엄미와 웅장미가 흐른다. 시간과 공간의 퇴적물이 많이 쌓인 강가일수록 평온하고 여유로운 정감이 배어나온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이해가 가고 수긍이 가는 증거를 시간의 질서 위에 꼭꼭 박음질해놓고 싶어지는 욕심, 그 욕구가 바로 열정이리라.

글을 쓰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음이다. 사라져 가는 시간을 붙잡아서 부패하지 않도록 사유의 뜰에 건조 시킨다. 사슴벌레처럼 딱딱한 편견과 오만의 등껍질에도 바늘은 꼽아진다. 비논리와 고집으로 엉킨 명아주 풀뿌리도 마르면 가볍고 단순해진다. 표본으로 박제된 사슴벌레와 명아주는 이제 영원히 내 시간의 채집상자 안에 들어와 화석이 된다.

곧 봄이 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시간을 채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