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목욕탕 소묘 / 최윤정

cabin1212 2018. 11. 16. 06:52

목욕탕 소묘 / 최윤정


 

 

시골에서 할머니 세 분이 같이 어울려 목욕을 하러 왔나 보다. 먼저 나오신 할머니 두 분이 목욕탕 마루에 드러누워 다른 분을 기다리고 계신다. 할머니들의 대화가 재밌다.

 

고마 홀딱 벗고 사는 나라에 살면 좋겠다.

집에서 영감 할마시 둘이서 홀딱 벗고 살그라.

 

온탕 안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몸피는 간만에 촉촉하고, 마음까지도 느슨해진 모양이다. 할머니들은 젊은 여자들처럼 씻고 나온 몸에 로션을 바르고 레이스가 달린 속옷의 후크를 채우고 작은 유리병을 흔들어 크림을 바르지도 않았다. 분주한 그녀들과 달리 그저 피곤한 행복감을 마루에 누워 오랫동안 즐기고 계신다.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이제 세 살쯤 된 듯 한 동생의 귀를 면봉으로 닦아주고 있다. 그러다 잘못 건드렸는지 애가 째지게 우는데, 할머니 세 분이서 우는 아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하하하하 웃으신다.

벌거벗은 젊은 여자들이 깔깔거렸다면 보기가 싫었을 텐데, 할머니들이 웃는 모습과 애가 우는 모습이 묘하게 어울려 보기 좋았다. 그런 동생을 달래는 여자애도 보기가 좋았다.

아주 늙은 여자들과 아주 어린 여자들이 알몸으로 내는 소음은 축축한 목욕탕 공기 속에서 온화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중간 즈음 젊은 여자 무리에 속해 있는 중이다. 어디든 사람 많은 곳에선 크게 웃지도 울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나는 아직 덜 여문 사람, 영혼에 요철이 많은 사람, 몇 번은 더 태어나야 겨우 사람 같을 사람이다.

어쩌면 저 우주 어느 곳에선 이런 생명체가 살고 있지는 않을까. 지구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육체는 없고 영혼만 있어서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만드는데 몰두하는 생명체. 그들이 몇 모여 두런두런 정담을 나눈다면, 지금 이속의 분위기와 닮아있지 않을까. 육체가 없는 세계에서 주고받을 것이라곤 마음밖에 없겠다. 마음밖에 없는 세상은 욕심이 없을까 아니면 더욱 거센 욕심의 회오리가 불까.

그런 생명체에 어울리는 몸피를 씌워준다면 오늘 저 할머니들의 모습일 것 같다. 어떤 욕심도 욕구도 없이 그저 평온함의 바다에 몸을 띄우고 출렁이는 저들의 지금 이 순간이 발할 수 없이 아름다워서 한참이나 마루 곁에 앉아 있었다. 발끝만이라도 그 물결에 닿아서 그 파도에, 바다에 동참하고 싶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평화로움의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딸아이가 천정엄마의 손을 잡고 탕에서 나왔다. 나는 막내를 챙겨야 해서 친정엄마를 고등학생인 큰애가 챙겼다. 아직도 자라는 중인 몸 옆에 많은 것을 상실한 몸이 서 있다. 막 환갑을 넘겼으나 저 몸에 안 가진 병이 별로 없다. 병중에 있는 엄마는, 저 할머니들과 같은 평온한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엄마다 안 되고 안 되어서 나는 엄마를 잘 쳐다보지도 않는다. 엄마를 안 볼 땐 그저 불쌍하고 애처로워서 눈물이 나다가도 마주 보고 있으면 근원을 알 수 없는 화가 난다.

기억을 거슬러 셈을 해보니 아마도 엄마가 지금 나보다 더 어렸을 나이다. 살림은 어찌해도 가난해서 참 열심히도 불쌍하게 살았다. 다른 아주머니들과 놀며 잠시 방탕하게도 지냈으나 그것마저도 생각해 보면 불쌍하다. 그렇게밖에 엄마의 젊음을 즐길 수밖에 없었으니, 똥개와 함께 노을을 보고 저녁을 먹고 집을 지키던 나는 그런 엄마를 용서한지 오래다.

큰애는 어릴 때 친정엄마의 손을 많이 타며 자랐다. 지나치게 냉정한 나와는 달리 딸은 제 외할머니에게 다감하고 애틋하다. 담배를 찾는 친정엄마에게 나는 눈을 흘기지만, 딸애는 얼른 나가서 피자고 다독이며 쭈글쭈글한 몸에 로션을 발라준다. 이런 딸에게 친정엄마에 대한 효도를 떠넘긴 적이 자주 있다. 또 아이들 보면 통증도 걱정도 잊고 웃으니 요즘은 내가 막내를 낳은 것도 효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쪼그려 앉아 양말을 신는 천정엄마 곁에 어느새 막내가 다가와 참견을 한다. 아직도 젖병을 떼기 전인 아이는 목욕탕이 난생처음이다. 이제 세상에 난지 스무 개월을 넘기는 중이니 앞으로도 처음인 것이 많겠다. 친정엄마의 벌거벗은 몸에 흥미가 있는지 아이가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만져본다. 엄마도 당신의 손녀를 마치 처음인양 안고 웃는다. 원래 길가는 아이만 봐도 말을 걸고 사탕을 쥐어주는 성격이니 손녀는 오죽할까. 늘어진 가슴을 꼬집는 아이의 머리에 볼을 비빈다. 아 엄마도 닿았구나. 그 바다에. 길고 험난한 항해 끝에 닿을 수 있다는 그 바다.

어느새 엄마의 고달픈 여정이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코끝이 뜨거워졌다. 저 작고 가벼운 배를 바다가 오랫동안 품어주었으며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