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동짓햇살 유감 / 김건수
동짓햇살 유감 / 김건수
일 년 중 햇빛을 제일 길게 드리우는 것은 동짓달이다. 거실을 지나 식탁 밑까지 파고든다. 햇빛은 바닥에 반사되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계절에 관계없이 내리비치지만 동짓달의 햇살은 약한 듯 강하다.
그런데 환한 햇살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식탁 밑까지 파고드는 햇빛이 심술궂은 바람처럼 종종 나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할 때 발밑을 내려다보면 먼지와 잡티가 하나하나 살아 움직인다.
아내도 이것을 보고 있다. 떠다니는 먼지는 잡티와 만나면 스멀스멀 움직이기도 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도 한다. 이들이 아내의 청소본능, 아니 일하는 본능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모르긴 해도 분명, 식사 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내는 생각해 낼 것이다. 가볍게 청소기 돌리는 것만으로 끝낼 것인가 아예 걸레까지 총동원해서 이들이 며칠은 꼼짝도 못하게 매서운 맛을 보여줄 것인가를.
나는 식사가 끝나자 신문을 집어 든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살핀다. 반면에 아내는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청소기를 집어 든다. 굉음을 내며 부엌과 식탁 밑을 누비기 시작한다. 청소기만 들면 무슨 환각제라도 먹은 듯 아내는 기운이 솟아나는 모양이다. 청소기 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려온다. 그 소리는 한국전쟁 때 거리로 들이닥치던 적 탱크의 깔리는 낮은 소리가 연상되어서일까, 불안해 진다. 이럴 때는 빨리 판단을 해야 한다. 전투에 즉시 동참하여 전우애를 발휘하든지 아니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신문을 계속 읽든지 해야 한다.
아내가 얄미워진다. 그냥 넘어가도 될 때는 넘어가야지, 탁자 밑으로 머리를 숙여 일일이 확인할 일은 아니다. 청소는 숨 좀 돌리거나 뉴스를 대충이라도 훑은 다음에 해야 한다. 더구나 자투리 시간에 해야지 금쪽 같은 오전에 한다면 그건 모두의 손실인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아내는 급하다. 해치울 건 빨리 해치워야 한다. 지저분한 상태에서는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의 속마음을 내가 다 안다. ‘일주일에 두 번? 끔도 크지.’
굉음 소리가 내 발밑까지 온다. 그러면 발을 들든지, 아니면 ‘사람 잡을일 있어?’라고 소리를 지를 일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무조건 항복을 해야 한다. 시간은 내게 불리하기 마련이다. 잠시 뒤 남자의 자존심은 오래 언덕 무너지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것은 아내가 아니라 저 햇살 때문이야말로 내 생각을 접지만 쥐꼬리만 한 자존심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마누라는 다홍치마 때 잡아야 한다는 말이 속상하게도 자꾸 떠오른다. 아니 호랑이가 된 지금 아내를 어쩌려고 어림도 없는 소리지.
「이방인」에 나오는 모르쇠를 떠올려본다. 그는 햇빛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다. 아내는 햇빛 때문에 청소기를 들었다. 그래서 한 남자를 잠재워 버렸다. 나는 다시 뇌까려본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내의 성향이 그래서가 아니다. 저 강렬한 햇살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밥을 굶지 않는 것도 자기 덕이고 이런 햇살 쏟아지는 아파트에서 사는 것도 자기 덕분이라고 한다.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자기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내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지.말을 거꾸로 하네.’ 라고 할만도 한데 나는 불만을 안으로만 삭힌다. 그래, 내가 진다. 내가 져. 같이 청소하자. 청소해서 나쁠 것도 없는데, 뭘. 하고 꼬리를 내린다. 한 마리의 순한 양처럼 말이다.
두 대의 청소기가 요란하게 돌아간다. 한 대는 덜컹덜컹 지나가는 경운기 같고, 다른 한 대는 육중하게 움직이는 탱크 같다. 아내는 소파도 들어서 그 밑까지 해치운다. 확인 사살이요 섬멸 작전이다.
지금 이 시간에 나는 큰소리 칠 면목도 없거니와 꼼꼼히 청소하는 아내를 못마땅해야 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될 일이기도 하다. 그 말도 못하는 내가 답답한 존재가 아닌가.
청소가 거의 끝났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내가 걸레를 든다. 같이 할테면 하고 말테면 말라는 표정이다. 좋았던 마음이 순간에 무너진다. 이렇게 밀리면 내 일은 언제 해. 책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다.
햇빛이 안방까지 드는 집은 의사가 필요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 면만 보고 다른 면은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나같이 느긋함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침햇살이 고울 리 없다.
두 사람이 사는 집에 한 사람을 살림꾼으로 만들어놓고 햇살은 저렇게 식탁 밑까지 파고들어야 속이 시원한가? 동짓햇살 정말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