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그러니와 그러나 / 민명자
그러니와 그러나 / 민명자
어느 잡지에 수필 한 편을 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책을 받아 보니 접속사 하나가 원고와 다르게 나와 있었다. '그러니'가 '그러나'로 바뀐 것이다. 순접順接으로 이어져야 할 문장이 역접逆接으로 이어졌으니 문맥이 통하질 않는다. 예컨대 '걱정하던 일이 잘 해결되었다. 그러니 안심해라.' 할 것을 '걱정하던 일이 잘 해결되었다. 그러나 안심해라.' 한 셈이다. 오타쯤으로 이해할 독자도 있겠지만 내 마음은 별로 개운치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비록 글에서만이 아니고 세상살이에서도 이처럼 '그러니'가 낄 자리에 원치 않는 '그러나'가 끼는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온 날들만 봐도 그렇다.
내 삶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한다면 그동안 살아온 시간과 이야기는 책의 행간과 문장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 '모년 모월 모일, 민 아무개 태어나다'로부터 시작되는 내 삶의 첫 페이지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상과 꿈의 언어들로 출발했다. 돌이켜 보면 그 무한하게 열린 여백의 장으로부터 적어도 열 다섯 살 이전까지는, 내 삶의 행간과 문장들은 행복의 연장선 위에서, 내가 바라는 대로 '그러니'와 접속되었던 시기였다. 그때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고 두려운 것도 없었다. 나는 마치 토질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려 적당한 수분과 햇빛을 받으며 여문 꿈을 키우는 나무와도 같았다. 그 시기의 이야기들을 묶어본다면 아주 행복한 주제로 이루어진 몇 개의 단락으로 구성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시기부터 나의 삶은 그때까지의 '그러니'와는 다른 방향으로 반전되어 갔다. 중학교 3학년 수업 도중 학교로 찾아온 이모가 울먹울먹 전해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 시작이었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일터로 나가셨다.
학생들이 모두 수업 중인 교정에서의 까마득한 적막감, 그 쨍한 햇빛, 교실에서 까르르 들려오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등 뒤로 환청처럼 들으면서 교문을 나설 때까지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나서야 비로소 '아, 나에게는 이제 아버지가 안 계신 거구나.' 하는 절망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승객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흘렸던 그때의 눈물은 바로 나의 삶이 의도하지 않은 것과 접속되는 순간을 확인해주는 증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충격으로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 후의 대학 입학과 중퇴는 또 어떠했던가. 당시 감당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도 대학은 내가 유일하게 붙들고 가야할 희망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끈을 놓아야 했다. '대학 중퇴'는 곧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에 대한 포기와 좌절을 의미했다. 이렇게 예기치 못했던 삶의 전환점들은 내 삶의 문맥을 어긋나게 하는 '그러나'로의 접속이었다.
그리고 결혼, 하나의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이 지점에서부터 나의 문장들은 수많은 느낌표와 물음표를 달기 시작했다. 남편과의 만남과 아이들 출산, 아! 그건 분명 느낌표였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보다 더 오랫동안 나는 물음표나 갈등의 언어들과 화해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니'와 '그러나'는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자리를 바꾸며 지금까지 긴 페이지를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그러니'를 내가 목표로 했던 과녁에 명중한 화살이라고 한다면 '그러나'는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명중하는 화살을 몇 번이나 쏠 수 있을까? 유년의 꿈은 아름답고 원대하지만 성장한다는 일은 곧 '그러나'를 배워가는 일이다. 그러기에 하나의 문장과 문장의 마디를 이어가듯 써가는 삶의 문장들은 아무래도 순접보다는 역접으로 접속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인생에서의 역접은 소설로 치면 반전이다.
소설에서는 반전에 반전이 거듭될수록 흥미를 더해준다. 줄리엣의 가사假死를 정말 죽은 것으로 착각한 로미오는 안타깝게도 그 곁에서 자살을 한다. 그리고 줄리엣이 깨어나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어서 줄리엣도 로미오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반전들은 독자를 얼마나 비장미로 이끄는가? 그러나 그건 다만 허구적인 세계에서의 아름다운 이야기 한 토막으로 남겨두고 싶을 뿐, 실제 삶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간혹 반전이 희망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흥부가 기른 박에서 보물이 쏟아지고 인당수에 목숨을 던진 심청이 환생을 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잠시 위안과 희망을 얻는다. 그러나 현대의 소설들에서는 이런 식의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은 이미 낡은 진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해피엔딩은 사절당하기 일쑤다. 문학이 현실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현재의 우리 삶에서 행복에 대한 전망은 비관적인 셈이다. 혹시라도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 고전에서와 같은 희망의 반전을 택하고 싶고, 쓸데없이 비바람 불어 과녁을 빗나가는 화살은 거부하고 싶지만, 지구는 여전히 돌고, '그러니'나 '그러나'도 제 마음 따라 돌고 돈다.
이제 나의 시간들은 미완의 페이지를 남겨두고 있다. 내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무한한 공간은 아니지만 내가 다시 채워가야 할 여백의 공간이다. 그 남은 페이지가 어떤 이야기들로 완성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고산 초원의 팀버 라인(timber line, 수목 한계선)에서는 수목들도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의 키를 낮춘다고 한다. 나무로 친다면 나도 그 경계선쯤에 서 있을 듯하다. 젊은 날의 격정과 저항보다는 내게 다가오는 일들을 오는 대로 받으면서 그저 순리대로 사는 것이 '그러니'로 접속하는 삶일지도 모른다.
우연한 인쇄상의 오식을 오히려 예술로 환원시키며 즐거워했던 어느 초현실주의 시인에는 못 미치더라도, 접속사의 오류 덕분에 어설프나마 단상 하나를 얻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그러나'를 '그러니'의 기쁨으로 잇는 일이 아닐까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