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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반 쯤 남은 술잔을 비우며 / 장수영

cabin1212 2019. 1. 6. 06:29

반 쯤 남은 술잔을 비우며 / 장수영



 

잠이 오지 않는다. 자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잠을 들이려 할 수 록 정신은 자꾸 또랑또랑 해 진다.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카페인에 유독 예민한 터라 오후에 홍차를 한 잔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아침에 커피를 한잔 하면 오후에는 커피든 차든 마시지 않지만 때로는 은은한 빛깔과 향에 이끌려 마른 입술에 혓바닥을 굴리며 홀짝이기도 한다. 오늘은 따스한 햇살아래 차 한 잔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 오후에 참지 못하고 마신 것이 밤을 뒤척이게 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 침실을 박차고 캄캄한 거실로 나왔다. 커튼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이 보일 듯 말듯하다. 어둠에 익숙해 질 때 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한 걸음씩 떼어 놓는다. 벽에 기대놓은 빨래걸이가 발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흡사 도둑고양이 생선을 노리다 덮치는 꼴이 이럴까. 차츰 고요한 실내가 어둠을 걷어간다. 벽에 붙은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시다 남은 소주와 김 한 봉지가 눈길을 끈다. 소주는 그저께 지인과 저녁을 먹으며 반주로 한잔씩하고 남았으니, 마신 것 보다 남은 양이 더 많아 아깝다고 가방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이 소주가 말이다 가스레인지 청소에는 정말 좋거든.”하면서 어색한 눈빛을 지으며 들고 온 것이었다. 그렇게 갖다놓은 소주가 이런 날은 참 요긴하다.

 

김 봉지를 북 찢어 놓고 소주잔에 반잔을 부었다. 혀끝으로부터 목을 타고 내려가는 맛이 쓰다. 가끔 잠을 못 이루는 밤이면 와인을 한잔 마시고 잠을 청하면 잠이 쉬이 들곤 했는데, 오늘은 와인보다 소주를 조금 마셔보고 싶었다. 그런데 술이 들어갈수록 머리는 점점 더 맑아지고 온갖 생각들이 사방에서 들어와 머리만 더 복잡해진다. 그러다가도 취기가 살짝 오르면 절정의 순간이다. 절정은 너무 오래 끌면 시들해 지고 만다. 일어서려는데 잔에 담긴 소주가 반이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김도 먹어버렸고 맑은 술 잔을 들여다본다. 마실까. 말까. 반잔 남은 술잔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생각에 빠지다 잔을 비운다.

 

카페인에 예민한 것이 생활에 많이 불편하다. 만남의 약속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장소가 커피숍인 경우가 많은데 실내에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은 매번 유혹에 빠지게 하지만 참아야 한다. 커피가 아니더라도 허브차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차들도 카페인이 없지는 않으니 이 또한 수면을 방해한다. 수면을 방해 받지 않으려면 커피는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한잔으로 만족해야 한다.

 

오래전, 저녁에 차 주전자에 차 잎이 물에 담긴 채로 아침까지 두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지으러 주방에 갔다가 주전자에 담긴 찻물을 마셨다가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밤새 담긴 차 잎에서 진하게 우러난 카페인이 그렇게 독한 줄 몰랐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천장이 빙글거리면서 한참을 울렁증에 시달렸었다.

 

지인들이 커피를 계속해서 마셔보면 몸이 익숙해진다고 해서 조금씩 수시로 마셔 본 적도 있었다. 그 또한 몸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수면 방해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카페인 과다로 멀미가 나거나 속이 메슥거려서 일상을 흐트러지게 했다. 그다지 예민한 성격도 아니면서 유난히 카페인에만 예민한 것은 달라지지가 않았다.

 

내 잠은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으니 카페인에 익숙해지는 연습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자리에 누워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워 본 사람이면 안다. 불면이 삶을 얼마나 갉아 내는지.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들 또한 카페인에 약해서 오전에 커피 한 잔 진하게 마신 날 가슴이 두근거려서 몹시 힘들다고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카페인에 약해서 커피를 멀리 하다가 가까이 한 지는 그다지 오래 되지가 않았다. 커피 맛을 제대로 알게 된 것도 커피숍을 하면서 부터였다. 요즈음의 문화를 이끌어 가는 트렌드가 커피다 보니 자연스레 조금씩 친해졌던 것 같다.

 

이제 커피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기호식품으로 자리매김 한 듯하다. 모임 후 2차로 가는 술 문화가 이제는 커피숍으로 장소를 이동하는 문화로 차츰 바뀌어져 가고 있다.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좀 시대에 뒤처진 사람마냥 여겨지기도 하고 거리에 나서면 몇 미터 거리 사이로 커피숍이 즐비하다. 한 때 건물마다 노래방이 들어서듯이 이제 건물마다 커피숍이 자리하고 있다. 커피는 기호식품이기도 하지만 커피 잔을 들고 거리를 걷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지도 이미 오래다. 체질상 술을 못 마셔서 사회생활에 고충이 있었다면 이제는 카페인에 약해서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도 고충이 없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술 문화 보다는 커피문화가 사회생활의 고충은 아마도 덜 하지 않을까

 

커피는 커피숍 외에도 자판기 커피부터 편의점 커피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생활가까이 스며든 지 오래다. 그러면서 가벼운 음료 마시듯 쉽게 생각하지만 카페인으로 인해 수면 방해를 받아 본 사람이면 오후에 마시는 커피는 피하게 된다. 어쩌다가 정말 어느 날 오후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연하게 내려서 은은한 향으로 즐기는 것도 권하고 싶다.

 

와인 덕분에 잠은 쉬 이루었지만 그 또한 아침이 개운하지는 않으니 편안하게 잠 잘 자는 것이 부러워진다. 가끔은 분위기와 향에 못 이겨 커피를 한 모금을 마시면 은근히 걱정이 되어 일찍 자리에 들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잠을 청해본다. 편안한 밤이 되리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