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잃어버린 후에야 보이는 것들 / 이혜경
잃어버린 후에야 보이는 것들 / 이혜경
결혼기념일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근사한 레스토랑을 일찌감치 예약해 두었다.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를 여러 번 나누어 조신하게 썰었다. 평소보다 반 옥타브 놓은 톤으로 웃고, 사소한 이야기에도 크게 손뼉을 치다보니 내 기분도 창문 너머의 봄 바다만큼이나 황홀하게 출렁거렸다.
식사가 끝나고 남편은 볼일을 보러 가느라 혼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택시를 잡았을 텐데 갑자기 걷고 싶어졌다. 지갑을 홀쭉하게 만든 비싼 밥값을 떠올라서가 아니라 부품해진 기분을 조금 더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를 보며 걷다 보니 한 시간을 걸어도 발이 아픈 줄 몰랐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하루였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습관적으로 거울에 먼저 눈이 갔다. 한참을 걸어오느라 살짝 분홍빛이 도는 낯빛에도 불구하고 얼굴 어딘가가 허전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 때문도, 고리를 먹느라 색이 날아간 입술 때문도 아니었다. 퍼즐 한 조각이 빠진 듯 얼굴이 비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귀걸이였다. 분명히 식당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귀밑에 달랑거렸던 귀걸이 한 짝이 사라졌다. 자취를 감춘 귀걸이 한 짝 때문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순간에 기분이 쭈글쭈글해졌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그것도 선물로 받아서 가장 아끼는 귀걸이를 잃어버리고 나니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가 없어 다시 1층을 눌렀다. 보통의 귀걸이보다 길이가 길고 보석 장식이 화려해서 더 늦기 전에 되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가닥 기대를 품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마자 고개를 꺾고 발밑을 하나하나 훑었다. 지금껏 아파트 복도에서부터 현관까지의 거리가 이렇게 먼 줄 미처 몰랐다. 얼룩덜룩한 대리석 무늬를 뚫어져라 살피고 있으니 금방 눈이 어지러워서 작은 귀걸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현관을 나와서 두 번째 코스부터는 실내에서보다 두 배로 집중력이 필요했다. 범위도 넓고 바람마저 불고 있어 어려운 코스가 분명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폴더 폰처럼 몸을 접고 발아래만 두리번거리는 나를 이상한 듯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의 눈을 의식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반짝거리는 것이 있다 싶으면 눈이 번쩍 뜨여 달려갔지만 작은 쇳조각이거나 과자 봉지 귀퉁이에서 뜯겨 나온 조각이어서 김이 샜다.
마침내 아파트 경계를 벗어나 아까 지나온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길은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로 여백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의 동선에 장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작은 귀걸이를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고개를 떨구고 있었더니 목도 아프고 블라우스는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나중에는 쭈그리고 앉다시피 해서 사방을 살폈다.
길 위에는 각양각색의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콩알보다 작은 장난감 총알에서부터 철사 조각, 못, 동전, 열쇠, 자전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쓰임새도 다양했다. 분명 똑같은 길인데 아까는 어째서 이 많은 것들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지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토록 복잡한 길 위에서는 도저히 귀걸이가 내 손으로 돌아오지 못하겠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귀걸이보다 길이 만들어 놓은 그림에 더 눈이 갔다. 각양각색의 잡동사니뿐만 아니라 길을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 자전거가 그려놓은 직선과 곡선,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나온 이름 모를 잡초가 한데 어우러져 길은 한 편의 인생도였다.
그동안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을까. 시간에 쫓겨 사느라 바빠서 그저 발밑의 부스러기쯤으로 생각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이름 모를 아이가 흘려놓고 간 장난감 조각을 보며 어린 시절에 함께 소꿉장난을 하던 소중한 친구의 얼굴이 스쳐갔다. 흙을 뒤집어 쓴 동전 위로 물질적인 계산보다 가슴의 신호를 먼저 따지던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이 겹쳐지기도 했다. 앞만 보고 종종걸음을 치는 동안 옆과 아래는 보지도 못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에 비하면 아무리 아끼는 물건이라도 내가 오늘 잃어버린 것은 한낱 작은 금속 조각일 뿐이다.
한 시간 걸려서 온 길을 되돌아가는 데는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시간과 정성을 쏟고도 끝내 귀걸이 한 짝은 실종 상태로 남았다. 그런데 허탕을 치고 돌아 거면서도 오히려 처음 귀걸이를 찾으러 나왔을 때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안달하는 마음까지도 실종된 귀걸이와 함께 사라진 듯했다.
어느덧 햇살의 방향이 비스듬하게 바뀌었다. 비록 귀걸이 한 짝은 잃었지만 그동안 잊고 살았던, 혹은 놓치고 지나간 삶의 파편들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며 다가오는 특별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