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돌감나무 / 서미애
돌감나무 / 서미애
첫서리가 내린 초겨울, 팔순이 넘은 친정어머니는 올해도 어김없이 감을 따 보내셨다. 올망졸망, 자두만 한 김들이 가득한 종이상자 안이 마치 꼬마전구를 켠 듯 주홍빛이다.
감나무가 많은 내 고향 청도에는 집마다 너덧 그루 이상의 감나무가 담장을 따라 서 있고, 신비한 곳곳에도 무성한 숲을 이루어 마을이온통감나무에 안긴 듯하다. 둥글납작하게 생긴 청도 반시(槃柿)는 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암꽃만 피어 꽃가루받이가 안 되고 수정하지 않아도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집도 예외 없이 예닐곱 그루의 감나무가 손을 뻗어 대오를 이루고, 마당우물가에는 돌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다. 돌감은 본디 야생에서 자라난 작고 볼품없는 김을 이르는데 우리 집 돌감은 감의 크기가 자잘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감나무는 고욤아무의 접붙이기를 통해서 탄생하는데, 이는 먼저 고욤나무를 심어 뿌리가 잘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부터 비롯된다. 4‧5월경, 나무에 물이 한창 오르면 그 밑동을 잘라 세로로 칼집을 내고, 한쪽 끝을 비스듬히 자른 가지를 칼집 사이에 물관을 맞추어 끼운 뒤 비닐로 칭칭 동여매 준다. 이때 나무는 제 몸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으며 싫든 좋든 부둥켜안아야 한다. 피 흘리듯 짜낸 수액이 상처를 아물리고 건강한 세포가 어우러져 튼실한 나무를 만들 때 마침내 먹음직한 열매를 맺으며 온전한 감나무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정성스레 접붙인 나무는 마침내 손톱만 한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제 그림자를 키우며 감꽃도 피워냈다. 초록 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피어난 감꽃은 콩알만 한 열매를 낳고는 미련 없이 내려앉아 마당을 노랗게 물들였다. 우리는 그 감꽃을 주워 꽃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며 시나브로 빼먹기도 했다. 감꽃은 떨떠름하면서도 단맛이 돈다. 마치 달콤한 홍시가 되기 위해서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거친 비바람을 잘 견뎌야 하는 땡감의 인고를 예시하는 듯….
어쩐 일인지 우물가의 감나무는 열매가 실하지 못하고 자두만 한 크기에서 더 자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시의 삼분의 일 정도로 상품 가치를 잃고 말았으니 아버지의 한숨에 나무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나무인들 낯선 가지와 선뜻 한 몸이 될 수 있었을까. 신랑얼굴도 모른 채 가마를 타야 했던 옛 여인의 운명처럼, 수없이 갈등했을 나무의 고뇌가 보이는 듯했다.
우리네 결혼 생활이 이와 같지 않을까. 자란 환경과 생활습관이 다른 남녀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상대를 선뜻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해 겪어야 했던 많은 갈등들. 서로의 잘못만 탓하며 마찰을 빚고 옥신각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가.
돌감나무는 마치, 뜻이 달라 자주 부모님의 모습 같기도 했다. 다부지거나 부지런하지 못하고 남다른 술버릇까지 있는 아버지는 도시로의 이주를 꿈꾸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믿지 못해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성실하지 못한 것은 농촌의 삶과 맞지 않아서라고 설득했지만, 어머니는 구멍가게로 생활을 대신 이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체 좁혀지지 않는 두 분의 간극은 또 다른 갈등을 낳으며 아슬아슬한 줄광대의 묘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깍지 끼운 나무가 그러했듯 애써 인내하며 용케 가정을 지켜내셨다.
감꽃이 진 자리에 벙긋 솟는 감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점점 부풀어 오른다. 가을이면 마을을 온통 주홍 물감으로 채색한 점묘화가 되고, 감 따는 장대들이 솟대처럼 하늘을 우러르며 마을은 더욱 분주해진다. 어머니는 홍시가 가득 담긴 함지박을 이고 새벽마다도시로 향했다. 삐걱거리는 대문소리에 잠 깬 시벽별이 어머니를 따라갈 즈음이면 교회 종소리도 댕그랑거리며 배웅한다. 이때돌감나무는 제 열매가 함지박에 담기지 못한 아쉬움 탓인지 더욱 처량한 그림자를 마당 가득 드리우곤 했다.
돌감은 반시보다 더 붉고, 달고, 차진 맛을 지녔다. 육질이 단단해 잘 터지지도 않는다.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하나가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맛과 빛깔로 보여주었다. 수많은 갈등을 잘 극복해준 부모님의 노력이 그 안에 투영되며 비로소 내 안에도 달고 차진 맛이 조금씩 채워지는 것 같다.
감에 씨가 없는 것은 젖을 먹이기 전 몽우리를 풀어 젖이 잘 돌게 해주는 어머니의 손길이 먼저 닿아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모유를 수유 받듯 달착지근한 맛으로 혀에 감기는 돌감 홍시를 매년 따 보낸다. 높은 가지의 감을 따기 위해 나무에 오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을 어머니는 그 자작한 감을 혼자 따면서 가득한 망태기를 비우려고 몇 번이나 오르내렸을지 모르겠다. 오 남매에게 각각 한 상자씩을 보내셨으니 그 개수가 족히 천 개는 될 듯하다. 그만큼 하늘을 올려보았을 어머니의 고개가 얼마나 아프실까.
나는 홍시 같은 어머니의 사랑 앞에 천 번을 고개 숙여 감사할 수 있을지. 달콤한 속살을 빨아먹고 쭈그러진 감 껍질을 보니, 어머니의처진살가죽 인양 가슴이아려온다.
돌감나무는 오늘도 마당 앞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듯 묵묵히 어머니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