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따뜻한 화석 / 강표성

cabin1212 2019. 4. 4. 05:55

따뜻한 화석 / 강표성

 

 

 

그것은 거대한 수묵화였다. 눈 덮인 산야는 저마다의 결과 선을 풀어내고 있었다. 흰색인가 하면 은회색으로 이어지고 회색으로 살짝 깊어지는 능선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은 어두운 등뼈를 드러내는데 묵은 그림에 덧칠을 하려는지 눈이 내렸다. 오르고 또 올라 하이 아틀라스 전망대에 다가서니 지난 시간들이 스쳐갔다.

사하라 사막이란 말에 마법에라도 걸린 듯 길을 나섰다. 말로만 듣던 북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날아왔고, 사막의 부드러운 속살에 닿기 위해서 해발 사천 미터 이상의 산맥을 넘는 중이었다. 혹한의 밤과 광야의 눈비를 견디는 설산들이 얼마나 성성한지 경이로웠다. 사월의 태양 아래서도 만년설을 인 듯 서늘했다.

하이 아틀라스 전망대에 올라서니 온통 하얀 세상에 웬 점이 찍혀 있다. 가까이 가서야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모로코의 전통복장인 회색 질레바를 걸친 남자가 눈보라 속에 서 있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거기 홀로이 있는 걸까.

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사진 찍기 바빴다. 어떻게 하면 북아프리카의 설경을 제대로 담아갈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 온 듯 부산을 떨다가도, 자동차 시동이 걸리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차에 쪼르르 올라타곤 했다. 그 다음에는 저장해둔 풍경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열어보는 게 순서다.

사진 속에 낯선 남자가 들어와 있다. 전망대의 베르베르인이 자신의 진열대를 구부정한 자세로 지켜보고 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눈발을 막으려고 한 손을 엉거주춤 들고, 다른 한 손은 여차하면 진열장의 뚜껑을 덮을 기세다. 갑자기 그의 상품들이 궁금하여 사진을 확대해 본다.

조붓한 진열장에 오밀조밀한 게 담겨 있다. 진열장이랬자 두 개의 가판대를 붙여놓았는데 그저 그런 물건들이다. 회색 돌들 사이에서 빛나는 노란 돌과 붉은 돌들, 베르베르인을 닮은 전통 토기 인형, 돌로 만든 접시와 쟁반, 그리고 크고 작은 화석들이 오종종하니 놓여 있다.

그중에서도 낯익은 게 보인다. 달팽이 비슷한 조개인데 빗살무늬가 선명하다. 책에서 보았던 암모나이트 화석을 실제로 접하니 신기했다. 중생대의 육지를 주름잡던 게 공룡이라면 당시의 바다를 대표하던 두족류의 흔적이라고 배웠던 게 생각난다. 동전만한 것도 있고 손바닥보다 큰 것도 있다. 조개류가 해발 사천 미터의 하이 아틀라스 산맥에서 나오다니, 까마득한 옛날에는 인근이 바다였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화석,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다. 죽어서 당시의 현실을 증거 하는 특별한 돌멩이다. 그것에는 살아 꿈틀거리던 생물이 돌멩이로 굳어지기까지의 시간과 공간이 녹아 있다. 홍수나 지각변동에 의해 토사물이 재빠르게 묻혀 공기가 차단되고, 엄청난 압력 아래서 유기물이 광물질로 변한 것이다. 그 하나에 당대의 환경과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여 시대의 지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남자가 좁은 진열장을 아이 다루듯 했던 이유를 알겠다. 사막에 비 내리듯, 갑자기 몰려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다. 눈 밝은 이가 오리라는 믿음으로 추위와 고립을 참아내는 사람. 가격표 한 장 붙여놓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는 그 어설픔이 딱하다. 참으로 귀한 보물이 다른 이들 눈에는 하찮아 보일 때의 겸연쩍음을 참아내면서.

그가 낯설지 않다. 왠지 찡하다. 동병상련이랄까, 나 또한 누가 관심 갖지도 않고 크게 쳐주지도 않는 나만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시장성과는 거리가 먼 상품, 그것들 때문에 서 있다.

글이 화석이나 다를 바 없다고 느낄 때가 더러 있다. 요즘처럼 재미있고 활동적인 매체가 주목받는 세상에서 글쓰기 자체가 구식 같다.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핸드폰 하나면 천지가 손안에 있고 하루해가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판을 맴돌고 있는 나다. 그럴듯한 상품 하나 없이 오래 전부터 판을 벌리고 있는 셈이다. 왜 민망스러운 적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홀로이 서 있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쓰는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은 생각과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은 미학적인 열정, 진실을 알아내어 보존해 두려는 역사적인 충동 그리고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이렇듯 저마다 동기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출발했고 어느 지점쯤에 서 있는 것일까.

혼자 서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을 영혼의 그림자 하나쯤 남기게 될 그런 순간을,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존재 자체로 살아남을 화석 같은 글을 기다리며 묵묵히 서 있다. 숱한 작품이 가라앉고 사라지는 이 순간에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서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쉽고 깊고 따스한 글을 써야 한다. 내가 이 길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삶의 온기가 묻어나는 수필을 건넬 수 있다면 좋겠다. 시린 마음을 어루만지고 눈물 핑 돌게 하는 작품들을 남기고 싶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화석 같은.

밖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린다.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직 먼데, 차창밖엔 수많은 눈발들로 어지럽다. 내 글의 길도 이리 난분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