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남자는 없었다 / 이영옥

cabin1212 2019. 5. 11. 06:17

 

남자는 없었다 / 이영옥

 

 

 

친정아버님이 올라오셨다. 팔순을 훌쩍 넘긴 치매가 의심되는 아버지가 인지기능 검사를 받으러 오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어머니도 함께 오셨다. 두 분은 오빠 집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병원에 함께 가기 위해 오빠 집으로 갔다. 나는 마침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병원 가는 길, 올케가 운전하는 차에 부모님과 함께 올랐다. 올케는, 의사에게 진료 받기 전에 사전 검사를 4가지나 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소변 조절이 안 되어 비뇨기과 진료까지 본다고 했다. 그동안 직장을 핑계 삼아 오빠부부에게 부모님을 맡겨두고 나 몰라라 한 것이 미안하고 가슴에 찔렸다.

병원에 얼추 다와 갈 무렵 어머니가 당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워쩐댜~워쩐댜~~~ 약 안 갖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시골에서 응급처치용으로 드셨던 비뇨기과 약을 서울 큰 병원 의사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큰일 난 것처럼 허둥대시니 계획을 바꿔야 했다. 병원에 도착하면, 아버지와 나만 먼저 내려서 사전 검사를 받고 어머니와 올케는 약을 가지러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병원 로비에서 휠체어를 대여해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서면서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른 검사는 다 괜찮지만 소변검사가 문제였다.

"아버지의 검사용 소변을 내가 받아야 하게 되면 어쩌나, 싫다고 할 수도 없고, 못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남잔데, 아버지도 남잔데……."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죄스러웠지만, 검사를 받기 위해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평소에는 느리기만 하던 병원 엘리베이터까지 빨리도 내려온다. 어쩌랴, 부딪혀 볼 수밖에. 아버지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일관 눈을 감고 계신다.

제일 먼저 채혈검사실에 들렀다. 채혈을 마친 간호사가 소변 검사용 컵을 건네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고 심드렁하게

"혼자 일어서실 수 있어요?" 하고 묻는다.

"~ ." 하고 대답하자, 그 후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한손에 소변 컵을 들고 휠체어를 민다. 죄 지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다 남자 화장실로 들어간다. 낯설고 어색하다.

안전봉을 잡고 변기 앞에 서있게 한 다음 나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풀기 시작한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내가 하는 대로 순한 양처럼 따라준다. 건장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어쩌다 내가 허리춤을 풀고 있을까. 콧날이 시큰해 온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 자리엔 아버지도 남자도 없었다. 골짜기 바위틈에서 숨바꼭질하는 어린아이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눈앞이 안개가 퍼지듯 뿌예지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소변 량도 아주 적다. 천천히 다시 옷을 추스른다. 지금껏 걱정했던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거동도 불편하고 의사소통도 어려운 아버지를 두고 못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딸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민망했다.

X-레이 촬영까지 모두 마치고 신경과 앞에서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반쯤 감긴 두 눈이 부처님의 눈처럼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땡볕에서 일하다 나와 마주치면 싱긋이 웃어주던 아버지의 구릿빛 얼굴이 귀공자처럼 뽀얗다. 손을 꼬옥 잡았다. 굳은살로 투박하던 손바닥이 갓 구워낸 빵처럼 보드랍다. 말을 잃어버린 듯 한마디 말씀도 없으시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어린아이가 되어간다. 아버지의 거꾸로 가는 시계가 속도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