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밑밥 / 박성희
밑밥 / 박성희
겨울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바다에 한기가 돈다. 바람도 몸을 사리는 듯 조심스레 물결에 입맞춤한다. 낚시하기 좋은 날이다. 시린 손끝으로 해동한 크릴새우의 머리와 꼬리를 떼어낸다. 너무 잘게 손질하면 밑밥이 빨리 가라앉기 때문에 듬성듬성 잘라놓는다. 손질한 크릴새우에 친환경 가루로 된 밑밥을 섞어 가볍게 버무린다. 반죽이 너무 되직하다싶으면 바닷물을 조금씩 첨가하면서 농도를 맞춘다. 반죽을 떠서 통의 벽에 문질러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뭉쳐지면 알맞게 된 것이다.
밑밥은 가능한 한 수면위에 오래 떠 있어야 한다. 물고기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탐색하고 음미할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파도와 조류를 살피며 살포시 수면 위로 밑밥을 흩뿌린다. 새우의 몸 색깔 때문에 흡사 복사꽃인양 나풀대며 물고기들의 입맛을 끌어당긴다. 잔물결에 휩쓸리며 서서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밑밥의 잔해들을 바라보자니 잊고 살았던 생채기 하나가 다시 아려온다.
그는 남편과 사업상 만난 사람이긴 했지만 서로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오랫동안 같은 업에 몸담고 있으면서 한솥밥을 먹는 이들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여름이면 두 집의 가족들끼리 뭉쳐 피서를 갔고, 겨울이면 뜨끈한 아랫목에서 고기를 굽거나, 손칼국수를 나눠 먹곤 했다. 서로 다른 도시에 살았지만 옆집인양 매일같이 안부 전화를 해오고, 무시로 들락거렸다. 또 철철이 선물 꾸러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반듯했고, 약속시간 한 번 어기지 않았다.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성실하고 정을 낼 줄 아는 후배였다. 자기 사랑은 자기가 산다고, 남편도 그의 일이라면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섰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맞는지 그의 아내 또한 살갑게 정을 냈다. 나도 젊은 부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내가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나눠주곤 했다. 매사에 무르고 느린 편인 나의 마음 빗장도 스르르 열려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그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전국에 가맹점이 있는 큰 거래처의 납품권을 따냈다며 물품을 대주기를 원했다. 시일도 촉박하고, 거금을 융통할 형편이 못되니 먼저 물건부터 납품해주면 두 달 후에 결제해 주겠다고 통사정을 하였다.
남편이 내게 의논을 해왔다. 금액이 워낙 큰지라 나도 몰래 난색을 표했다. 남편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결심한 듯 사정을 봐 주자고 했다. 그동안 나누었던 살가운 정 때문에 거절하기가 곤란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들이 아플 때 싸매주고, 가려울 때 긁어주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살얼음이 끼려던 마음을 거두고 말았다. 납품 계약서를 써주었다. 그들은 형님네 때문에 살았다며 두 손을 부여잡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산더미 같은 분량의 물품들이 실려 나갔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상생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 여겼다.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버리는 외골수적인 면이 있어 손톱만큼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환한 미소로 물품을 실어주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인사도 함께 보냈다.
약속한 날짜가 총알처럼 지나갔다.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남편의 전화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받던 그였다.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어렵게 통화가 되었다. 일이 잘못되어 부도 위기에 처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께는 일체의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눈앞에서 무수한 날파리들이 춤을 추었다. 현기증이 나더니 귀에서 쨍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오래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남편은 불에 덴 사람처럼 뛰어 다니면서 뒷수습을 해야 했다. 그들이 보여 준 따뜻함이 악어 눈물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모두들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간 후에 등을 치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이 세상이라는 너른 바다에 달콤한 향으로 버무려 뿌려둔 밑밥을 의심 없이 받아먹은 꼴이 되었다. 미련하게 밑밥을 받아먹은 물고기는 이미 눈과 귀가 무디어진 후라 현란한 미끼의 유혹에 넘어가는 법이다. 그들이 남겨준 상흔은 날카로운 낚시 바늘이 되어 몸과 마음을 찔렀다.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깊이 박힌 바늘을 뽑아내야 했다. 아직도 그 차가운 갈고리를 빼지 않고는 결코 살 수 없음을 온몸으로 배워가는 중이다.
밑밥이 어디 때와 장소를 가리며 뿌려지는가. 미끼를 물도록 유인하는 이 사나운 먹거리를 피해서 한 세상 건널 수 있다면 다행이다. 언짢은 마음에 밑밥을 뿌리던 손을 거두고 만다. 그제야 갯바위를 씻어주는 흰 파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속에 아직도 쌓여있는 밑밥의 찌꺼기가 남아있는지 돌아본다. 그 모든 것들이 훌훌 씻겨나가길 바라며 차가운 바닷물에 손을 담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