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자리를 꿈꾸다 / 정재순

cabin1212 2019. 7. 26. 05:35

자리를 꿈꾸다 / 정재순

 

 

 

숙이네가 원당골에 가자고 한다. 꽃구경도 하고 점심도 지어 먹자고 해서 얼결에 그러자고 답했다. 여럿이 함께 어울린 적은 있지만 혼자 초대를 받기는 처음이다. 새치름한 그녀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은근 걱정이 앞선다.

산기슭 숙이네 집에는 꽃들의 잔치가 한창이다. 금낭화가 홍사초롱을 내건 화단에는, 라일락 향기에 취한 양귀비가 가녀린 몸매를 살랑인다. 지난 밤 별이라도 내려왔을까. 키 작은 아기별꽃들이 오종종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금잔옥대는 청초한 각시붓꽃에게 입술을 내밀며 속살거린다. 나비 수백 마리를 뭉쳐놓은 것 같은 수국을 흔들면 나비가 하늘하늘 날아오를 것만 같다.

곳곳에 정성을 들인 흔적이다. 지난겨울 지었다는 육각 정자며, 손수 일구었다는 텃밭이며, 눈이 가는 곳마다 숙이네 손길이 스며있다. 햇볕 환한 마당가에 항아리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세월을 발효시킨다. 어디서 구했는지 돌절구와 맷돌이 덩그러니 앉아 촌집 정취를 살린다. 주방 선반 위에는 색깔도 모양새도 다른 질그릇이 투박한 멋을 부린다.

그녀가 사림과의 인연을 들려준다. 무겁거나 말거나 예쁘면 용서하는 숙이네가 아니던가. 방과 거실의 옷장이나 장식장은 그녀가 사는 아파트 주민들이 내다놓은 걸 가져왔다. 부엌의 그릇도 이웃이 버린 것을 말끔히 닦았다고 한다. 쓰윽 봐도 하나같이 쓸모 있다. 말하지 않았으면 감쪽같아서 새것인 줄 알겠다. 세상에, 숙이네가 이렇게 알뜰살뜰한 구석이 있다니.

찻상 잎에 마주 않는다. 국화차를 준비하는 그녀의 손놀림이 차분하다. 하나의 다기에서 우러난 차를 함께 마시자 둘의 마음이 하나의 향기로 젖어든다. 그동안 마음 한 겹 안 열어 보이더니, 마음의 빗장을 풀고 속엣 말을 조금씩 풀어낸다.

성격이 예민한 탓이었을까. 말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거늘, 밤을 지새운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단다. 정작 막말을 쏟아낸 자는 기억조차 못하는 세상인데 말이다. 숨이 가쁘고 심장을 찌르는 고통에 병원을 찾아갔으나 병명은 알 길이 없었다. 용하다고 소문난 곳을 수없이 두드리고 한약, 양약 온갖 요법을 써 봐도 후련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녀에겐 부족한 데라곤 없어 보였는데, 다 버리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릴까 마음도 먹었단다.

숙이네를 보다 못한 남편이 이곳에 촌집을 마련했다. 소심한 아내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남편을 생각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처음에는 엄두도 못 냈지만, 징그러운 벌레에게도 스스럼없이 손이 갔다. 달이 차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꽃밭을 가꾸고 텃밭도 일구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동안 원하는 무언가가 자꾸 만들어졌다. 아하! 이런 게 삶이구나 싶더란다.

뭐든 땅에 심기만 하면 햇살과 비바람이 키워낸다. 감나무 잎이 눈곱만 해질 즈음 호박씨를 묻어놓았더니 싹이 돋아났다. 연이어 넝쿨이 번지고 꽃이 진 자리에 엄지손가락만 한 열매가 달렸다. 땅에 뿌리를 내린 것들과 교감하면서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고 환해졌다. 그런 것들은 차츰 마음을 두드리고 끝내 마음자리의 어둠까지 깨웠다.

처음에는 허락 없이 대문을 밀고 들어오는 원당골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단다. 본데없는 치들로 여겨져 말을 피했다. 그런데도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과 말을 섞다보니 먼저 말을 걸게 되었다. 이제는 원당골에 도착하면 아예 마당을 열어 놓는다. 차 한 잔 대접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속이 개운하단다.

저 평온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찬찬히 짚어보았을 것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고 경계하는 세상과 다투다 보면 마음에 생채기가 나기 십상이다. 밉다고 세상을 짓밟을 수도 패대기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보다 느리면 어떻고 덜 가지면 어떠랴. 욕심을 채우는 길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을 치유하는 길을 찾았다니 반가운 일이다.

시장기가 돈다. 숙이네가 목에 무명수건을 질끈 묶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따라나선다. 발을 감싼 다홍색 고무신이 신명을 낸다. 예닐곱 평 텃밭에 생전 처음 보는 새하얀 감자꽃이 정겹다. 가지꽃은 노란 속살을 살포시 드러내고, 블루베리도 머루 빛으로 영글어간다. 밭두렁에 가죽나무가 발그레한 새순을 잔뜩 내밀고 있다. 방풍나물과 상추를 한잎 두잎 따다보니 어느새 바구니가 풍성하다.

된장찌개에 가죽 순으로 전 굽는 내음이 더해 벌써 배가 부르다. 쟁반에 음식을 담고 알록달록한 야채를 차리자 텃밭을 통째로 밥상위에 올린 것 같다. 손수 가꾸고 거둔 것을 한 입 넣으니 상큼한 자연이 입 안 가득 찬다. 김장김치의 아삭하고 시원한 맛을 걸쳐 잡곡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다.

배가 부르면 여유가 나지 않던가. 마당으로 나가니 바람이 머리칼을 흔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잘 다듬어진 꽃 마당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텃밭을 지그시 바라본다. 포만감 위에 더해지는 안빈낙도. 그래, 이것이 그녀가 되살아난 이유구나.

누구에게나 마음 놓을 자리가 있을 것이다. 소는 풀밭이, 나비는 꽃이, 긴 여행에 지친 자는 따뜻한 아랫목이 그러할 터이다. 뭇별, 들꽃, 산들바람이 어루만져 주는 곳, 어느새 나도 마음 내려앉을 자리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