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북 / 윤경화

cabin1212 2019. 8. 7. 06:07

/ 윤경화

 

 

 

콩밭을 매고 난 뒤 밭둑에 앉아 이랑 사이로 썰렁썰렁 지나가는 바람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콩밭에 이는 율동은 시원하고 자유롭고 넉넉하다. 포기마다 두두룩한 북 속에 세상의 복이 들어 있다.

북은 초목을 싸고 있는 흙을 일컫는 말이다. 콩밭의 북은 농부의 손과 호미 끝에서 모아지고 쌓인 영양소가 듬뿍 든 맛있는 콩의 밥이다. 농부는 삿된 마음을 갖지 않고 밥을 모은다. 연보라색 콩 꽃이 일기 시작하면 콩밭은 멀리 서 있어도 향기가 난다. 구수한 콩밭 냄새다.

북을 한 주먹 들고 코를 대고 혀를 대어 보면 콩이 얼마나 열릴 것인지 알 수 있다. 땀 냄새와 짠맛이 깊을수록 콩꼬투리는 무겁다. 정성이 많이 들수록 윤기가 흐르고 몽글다. 사람도 그와 같다.

돌아가신 시어머님과 가깝게 지내던 어른을 지난 새해에도 만나 뵈었다. 신수를 보시는 그분이 하신 말씀이 '니가 북인기라'였다. 토막말 같은 이 한 마디는 서른한 해 동안 신수를 단골로 본 덕에 얻은 귀한 말이다.

내가 신수를 보게 된 동기는 평범했지만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시집오고 첫 해에 어머님을 따라 신수를 보러 갔다. 어머님보다는 연하로 지금의 내 나이쯤으로 보이는 분이었다. 시어른의 뜻에 따라 갔지만 분위기가 흥미로웠다.

서로 존댓말로 새해인사를 나누는 데 한 시간도 더 걸렸다. 신수는 보지 않고 그분과 어머님은 서로 집안일이나 그동안 격조했던 이웃 소식을 그렇게 길게 주고받으시는 것이었다. 오 서방네는 다리가 아파 고생을 했고 큰손자는 올해 대학을 가고, 작은 아들은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할배는 요새 기침을 자주 하고정작 신수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오 서방네는 올해 좀 쉬는 게 좋겠심더. 큰손자는 나쁜 친구와 어울리지 않도록 식구들이 마음을 쪼매 써야겠심더. 회사가 어려운 거는 마아 좀 기다리 보소. 할배는 따실 때까지 찬바람 쐬지 말고요."

현관을 나서는 우리 고부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말씀 더 보태신다.

"새댁은 올해 신랑 보약 한 제 믹이래이."

이런 황당한 신수를 세대를 갈아가며 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다섯 해가 지났다. 새해 초사흗날이면 어머님이 나를 기다리시던 버스정류장에는 반백이 된 큰동서가 기다린다. 황당한 신수를 함께 보러가기 위해서다.

두어 시간 앉아 있으면 집 난 사람은 고향의 돌아가는 일을 다 알 수 있다. 그리고 닳아 반들거리는 바가지에 손수 만든 강정을 가득 내어주면 빈 바가지가 될 때까지 큰형님은 어머님보다 많은 것을 물어보신다. 직계가족의 범위를 벗어나 이웃의 소식까지 친절하게 말씀하시면서.

그 어른을 우리는 그냥 아지매라고 부른다. 촌수가 멀어져 따져가며 호칭하기 곤란할 때 부르는 따뜻한 명사로 남자는 아재, 여자는 아지매라고 부른다. 편하고 친밀감 넘치는 이 호칭은 촌수의 거리감을 좁혀주고 서로에게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

올해 아지매는 확실한 신수를 봐주었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지만 아지매를 만나는 날은 느긋하게 앉아 있게 된다.

"이봐라, 새댁은 아가 하는 일에 한 마디씩 거들고 좀 살피래이."

아는 우리 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앞선 교육을 받아 제가 도울 것이 그다지 없습니다."

"이이고, 마아 가인테는 새댁이 북인기라."

나는 중요한 것에 밑줄을 긋는 데 선수다. 언제든지 그 언저리에 가기만하면 밑줄 그은 것은 먼저 눈에 들어오니까 편리하고 확실해서 좋아한다. '북은' 눈에 쉽게 들어오로록 붉은 형광펜으로 긋고 싶었다.

내가 누구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배부르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도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평생 일하면서 사는 사람이라 어미노릇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내가 거둘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눈치 빠른 아지매의 말씀이다.

"벨기 있나. 젊은 사람인데 없는 거 주면 되지."

''은 나에게 벼슬과 같은 것이다. 벼슬 값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그 능력을 좋은 일에 썼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을 우러러봤다. 누군가의 시린 손발을 덮어주고 따뜻한 눈길로 언 가슴을 데워주는 일이 북과 다르지 않다.

이왕 북이 되려면 농부가 콩밭을 매고 북을 돋우어주듯이 정성을 다할 일이다. 넓어진 이랑사이로 사람들의 마음이 막힘없이 썰렁썰렁 드나든다면 그곳이 바로 세상의 복이 다 모인 북이 아니겠는가.